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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사람 곁을 떠난 고양이- 조재영(시인)

  • 기사입력 : 2014-07-11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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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를 좋아하세요?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내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이다. 고양이의 새침한 표정과 하얀 수염이 나는 좋다. 작은 몸을 뒤집으면서 재롱을 부리는 모습이 나는 좋다. 한없이 들여다보게 되는 우주를 닮은 신비로운 눈동자도 그렇다. 개와 달리 호불호가 나뉘는 고양이와 교감을 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아주 특별한 즐거움이다.

    오래된 이집트 청동 조각상의 단골 소재인 동물은 고양이다. 비옥한 나일강을 주변으로 도시가 형성되고 농사가 풍작을 거듭하면서 창고에는 곡물이 넘쳐났다. 문제는 쥐떼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양이를 키워 쥐를 막게 되었다. 한꺼번에 대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는 고양이는 고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번영과 다산의 상징이었을 법하다. 그런데 농경사회 대신 산업사회가 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고양이들이 더 이상 쥐를 잡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쥐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쥐가 없는 곳에서 고양이들이 자라고 있는 셈이다.

    어느 봄날의 일이다. 산책을 하고 있는데 초등학생 여자 아이 둘이서 상자를 마주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상자에는 웃고 있는 고양이 얼굴이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주인을 찾습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상자를 열어 살펴보니 몸집이 아주 큰 노랑 고양이였다.

    근래에 그렇게 큰 고양이는 처음 보았다. 고양이는 자신의 큰 덩치가 죄인 것처럼 웅크리고 앉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고양이는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서 버림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이렇게 큰 고양이가 자기의 집을 모를 리가 없었다.

    시인 황인숙은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라는 시에서 고양이를 매우 낭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 태어나리라. /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이 시에서 등장하는 고양이는 쥐 대신 참새들을 쫓아 너른 들판으로 나가는 멋쟁이다. 다른 집고양이들처럼 툇마루에서 졸거나 사기 그릇의 우유를 핥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집을 떠난 고양이들의 삶은 시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생존을 위협하는 배고픔과 야생환경의 험난함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도 ‘집’ 밖에는 많은 고양이들이 ‘길냥이’라는 이름으로 방치되고 있다. 길냥이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자 일부 지자체에서는 ‘동물복지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 조례’를 제정하고 길냥이 급식소를 도입하기도 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것은 근본적인 치유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품종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지도 하고 소유자가 생기지만 고양이는 물건이 아니다.

    나는 근래에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 있던 애완동물이 마중을 나온다는 내용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울창한 숲 사이로 고양이가 반갑게 마중을 나오고 있었다. 애완동물과의 교감을 표현한 흐뭇한 그림이었다. 누군가 자신과 교감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삶의 큰 기쁨이다. 길냥이의 사회적 문제나 그 해결책 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나는 앞으로도 고양이와 사람이 동고동락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조재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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