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0일 (토)
전체메뉴

[작가칼럼] 토지로의 피서- 김이듬(시인)

  • 기사입력 : 2014-07-18 11:00:00
  •   
  • 메인이미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 같은 큰 목소리에서 우리는 소외되어 있지만,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사정으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황현산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휴가철이 다가온다. 뭘 할지 어디로 떠나볼지 즐거운 고민에 빠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눈앞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때때로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기도 해야 한다. 주위에서 추천하는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국내외 여행지’는 엄청나게 많지만 선뜻 나서기에는 수많은 조건들이 따른다.

    우리 모두는 여행자이다. 삶으로 잠깐 소풍 나온 순간순간을 산다. 여행 가는 사람과 마주치면 나는 묻곤 한다. “무슨 책을 가지고 가세요?” 이상하게 그런 게 궁금하다. “몇 권이나 가방에 챙기셨어요?”

    대학 시간강사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방학이 되면 들뜨고 설렌다. 이 기간엔 시도 많이 쓰고 싶고, 좋은 데 가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고, 낯선 세계로 날아가 다양한 경험을 하며 새로운 환경에 젖어보고 싶다. 하지만 이번 여름방학에는 진중하게 고뇌 한가운데 있어야 한다.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를 밀착한 후 이빨로라도 책상을 물고 늘어져야 할 사정이다. 당연히 내가 간절히 원해서 선택한 피서의 방식이다.

    지금 나는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이 글을 쓴다. 자정 즈음이다. 적막하다. 숲에서 우는 검은등뻐꾸기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린다. 고 박경리 선생님이 후배 작가들을 위해 설립한 창작 레지던스 공간에는 국내외에서 모인 17명의 예술가들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화가, 음악가, 극작가, 소설가, 시인 등 작업하는 장르도 다양하다.

    이곳의 작가들은 대체로 조용하다. 이들이 서로의 방문을 두드리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종종 고독의 연대감이 느껴진다. 점심 식사를 마치면 재빠른 걸음으로 곧장 작업실로 향하는 이도 있고 마당에 있는 연못가에 앉아 수련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도 있다. 더러는 삼삼오오 근처 성황당이나 옥수수밭 지나 복숭아밭 입구까지 산책하기도 한다. 늦잠을 자든 창작에 몰두하든 간간이 오는 버스를 타고 외출하든 아무도 간섭하지 않지만 작가들은 자발적인 감금 상태를 고수하려고 한다.

    아주 가끔은 마주앉는 순간이 있다. 칠월에 입주한 작가들과 통성명도 하고 스페인에서 온 저널리스트 겸 소설가인 안토니오 로자노(Antonio Lozano)도 환영할 겸 해서 저녁 늦게 구내식당에 모였다. 1만 원씩 갹출하여 차린 조촐한 파티였지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소소한 얘기에 크게 웃었다. 내가 술이 조금 취했을 때쯤 신비로운 음악소리가 들렸다. 식탁 저쪽에서 정민아 씨가 가야금을 뜯으며 천안도삼거리를 불렀다. 이어지는 곡은 그녀의 자작곡 ‘무엇이 되어’였는데 문득 나의 보잘것없음이 무로 돌아갈 인생이 서러워졌다. 어렴풋한 윤곽으로 흔들리는 그 어떤 존재를 무엇으로 표현할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부모는 넘실거리는 바다의 능선 앞에서 캄캄할 것이다. 나 또한 끝내 잊지 않겠다 다짐을 하였으나 나의 모래성을 쌓는 데 골몰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떠나든 머물든, 이름난 여행지에서 세기의 여름을 보내든 우리들의 피서는 완전하지 못할 거라는 뼈저린 진리를 이 새벽에 시리게 받아들여야 한다.

    김이듬 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