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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풍수지리] 매장과 평장의 올바른 인식

  • 기사입력 : 2014-07-21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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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중산에 흩어져 있는 조상 묘를 화장(火葬)해 자연장의 일종인 평장(平葬)으로 함께 모시는 경향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형제끼리 의견이 맞지 않아 평생 원수지간이 되는 경우도 간혹 볼 수 있다. 함께 모시되 화장은 절대 불가하며 비록 백골이 진토가 됐지만 흙만이라도 이장(移葬)하기를 고집하는 분들과, 현대의 장법 추세에 호응함과 동시에 후손들에게 무거운 짐(봉분과 주변을 관리하는 일)을 넘겨주는 것이 싫어서 화장을 고집하는 분들 간의 다툼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화장을 한 후 평장을 할 때는 제일 상단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안치를 하면 되지만, 일정한 규정은 없기 때문에 혈(穴)을 보호하기 위해 좌청룡, 우백호, 전 주작, 후 현무가 있는 것과 같이 중앙에 제일 큰 어른을 모시고 그 주변을 둘러가면서 마치 제일 큰 어른을 보호하듯이 안치하는 방식도 무방하다.

    석물(石物:무덤 주변에 설치하는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은 상석, 와비, 장대석, 걸방석, 북석, 사구석, 망주석, 장명등, 향로석 등 많은 종류가 있지만 모두 갖추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꼭 필요한 석물 외에는 설치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자칫 너무 많은 석물로 인해 땅이 몸살을 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동기감응(同氣感應:생기가 있는 터에 조상이 안치되면 후손에게 생기가 그대로 이어져서 복을 받음)의 가능 여부는 백골만의 문제가 아니라 혼백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봐야 하므로 지기(地氣)를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화장을 해도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음을 강조하고 싶다.

    조선조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은 본래 현재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아래에 있는 부왕인 태종의 능인 헌릉(獻陵) 곁에 영면했는데, 영릉(英陵)에 안치된 다음 세종에 이어 용상에 오른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종기로 승하하고, 단종은 재위 3년 후에 사약을 받아 죽고, 세조는 재위 13년 만에 지병으로 죽고, 예종은 재위 1년 만에 승하하면서 19년 동안 무려 4명의 임금이 바뀌었다. 그러자 영릉의 터가 흉하다고 해 예종은 상지관인 안효례에게 천장(遷葬: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김)할 터를 물색하라 했고 안효례는 (구)영릉을 이장할 터를 구하기 위해 여러 곳을 답사하다가 이계전(고려 삼은의 한 분인 이색의 손자)의 묘가 자손이 번성하고 만대의 승업을 계승할 터라고 추천했다.

    그런데 이계전을 장사 지낼 때에 지관이 “어떤 일이 있어도 봉분이나 비석을 만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당시 세도가였던 한산 이씨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봉분을 만들고 비석도 크게 세운 바람에 안효례의 눈에 발각이 되고 만 것이다.

    영릉이 경기도 여주로 이장을 하게 되자 주변에 있던, 세조 때에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도 이장을 해야만 했는데 임금의 능지로 결정되면 사신사의 국세 안쪽에 있는 모든 가옥이나 묘 등은 지맥을 보호하기 위해 철거되는 것이 국법이기 때문이었다.

    (구)영릉을 이장하기 위해 파보니 석실 내부에는 찬물이 들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시신과 수의가 하나도 썩지 않고 장사 지낼 때와 똑같았다고 하며, 여주로 영릉을 이장한 후 그 터가 천하의 명당이라 조선의 국운이 100년 더 연장됐다고 해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란 말이 생겨났다.

    (화산풍수·수맥연구원 055-297-3882)

    주 재 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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