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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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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산초와 고무링- 윤봉한(윤봉한치과의원 원장)

  • 기사입력 : 2014-07-29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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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에 산초가 났다. 초록 산초송이가 고두로 담긴 세숫대야만한 플라스틱 통을 앞에 놓고 쪼그랑할머니가 앉았다. 통도사 근처의 식당에서 산초장아찌를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나서 장아찌 담는 법을 물었다.

    “할머니가 맛있게 담는 비법을 아실 것 같아서요” 하니 모른단다.

    “산초로 장아찌 담아 먹지 않으면요?”

    “다들 술 담그지. 소주 부어서. 여기에 술이 이만큼 올라오게. 오래둘 필요도 없어. 금방 익어. 속 따뜻한 데 제일이야” 하며 산초 술 제조법과 예찬론을 함께 편다.

    사실 통도사 매표소 근처 식당에서 산초에 관해 짧은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걷기에 재미를 붙이면서 자주 찾게 된 식당이다. 쉬엄쉬엄 본전을 지나 근처 암자를 들렀다 오면 2시간 남짓의 적당한 걷기 코스가 된다.

    특히 매표소에서 본전까지의 길은 노송과 흙길이어서 찾아간 값을 한다. 식당에는 두 가지 산초장아찌가 나온다. 하나는 열매, 또 하나는 잎으로 만든 것이다. 특히 잎이 맛나서 주인에게 물으니 “그건 산초 아닌데요” 한다. “헷갈리죠, 그건 산초가 아니고 초피예요.” 그래서 식당에서 듣게 된 산초에 관한 강의다.

    산초나무와 초피나무가 따로 있다. 경상도식 추어탕에 들어가는 것은 산초가 아니다. 초피 열매를 말린 것이다. 지역에 따라 제피나 젠피라고도 부르는데 다 초피의 사투리다. 초피에 비해 산초 열매는 향이 강하지 않다. 적당히 향긋하다. 그래서 열매째 통으로 먹는 장아찌를 담을 때는 산초로 한다. 장아찌로의 초피는 잎만 쓴다.

    구별법은 줄기에 가시가 어긋나게 달리면 산초다. 그리고 초피는 봄에 꽃이 피고 산초는 여름에 꽃이 핀다. 물론 잎 모양도 열매 모양도 알고 나서 다시 보면 전혀 다르게 생겼다. 그런데 왜 초피와 산초를 혼동해서 부르는 것일까. 일본어로 초피를 산초(山椒)라고 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초피와 산초가 일본의 산초와 뒤섞여 버렸을 것이다. 초피든 산초든 우리나라 남부지방 산과 들 어디서나 흔한 나무다.

    새로 알게 된 이야기라 식당 주인의 강의를 친구들 모임에서 했다. 하지만 다들 나만큼은 재미있어 하질 않는다. 정확한 어원이야 어찌되었건 아마(어쩌면 나를 포함해서) 앞으로도 산초라 부르던 것을 금방 초피로 바꿔 부를 것 같지는 않다. 할 수 없다. 한 번 굳어지면 바꾸기 어려운 게 말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말을 만드는 것에 유독 신경을 쓰는 것도 이유가 있다. ‘정의 사회 구현’이고 ‘문민정부’고 ‘참여정부’고 ‘4대강 살리기’도 그렇게 공들여 만들어진 말들이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있다. 비정상적인 고무링을 정상적인 고무링처럼 잘못 사용했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비극적 사고에 어원이 있는 말이다. 원래의 뜻은 ‘비정상’인 것을 ‘정상’처럼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반면 박근혜정부의 용법은 정반대다. ‘비정상’인 것을 ‘정상’으로 고치자는 것이다. 용법은 다르지만 이루고자 하는 뜻은 같다.

    ‘비정상의 정상화’는 박근혜정부 국정의 상징이다. 그런데 말이란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냥 살아있는 생명체다. 매일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의 옷을 갈아입으며 아이처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고무링에서 비롯된 ‘비정상의 정상화’도 ‘4대강 살리기’처럼 10년 20년 뒤에는 어쩌면 처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말이 되어 있을 수 있다. 억울해도 할 수 없다. 말이 그렇고, 세상이 그렇다.

    윤봉한 윤봉한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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