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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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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학의 텃밭] (8) 홍진기 시조시인

천주산 약수터길 오르내리며 쌓은 내 글의 울타리

  • 기사입력 : 2014-08-05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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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진기 시조시인이 영혼의 문을 열고 영혼의 귀로 듣게 하는 천주산 약수터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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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진기 시조시인이 창원시 천주산 약수터길 나무 아래 앉아 있다./김관수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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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 천주산 중턱 계곡에서 시작되는 작은 돌개울이 소계동과 구암동을 가르는 소계천으로 이어진다. 그 소계(召界)골을 저만치 내려다보고 비스듬히 오르는 길이 천주산 약수터 가는 길이다. 오 리가 채 못 되는 길, 이 길을 소나무와 벚나무 그리고 편백과 상수리가 지키고 섰다. 가히 도열과 사열이라 할 만하다.

    그 분에 넘치는 호위를 받으며 삼 마장 남짓 올라가면 거기 천주산 약수터가 있다. 아침나절이나 저녁 무렵에 이 길을 걷는다. 지금은 체육공원이 말쑥한 단장으로 길 들머리에 자리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지만, 그러나 몇 년 전에는 그냥 시멘트 포장, 알맞게 넓은 조용한 산책길이었다.

    아침 해를 등에 지고 이 길로 들어서면 풀잎에 매달린 이슬방울이 발목을 걸어 당기고 눈을 붙잡는다. 이슬이 그냥 맑고 투명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5색, 6색, 7색, 자연의 신비요 가없는 조화였다. 그때의 놀라움과 기쁨은 충격이었으며, 형언키 어려운 큰 한 발견이었다. 풀잎에 비끼면 에메랄드, 하늘에 비치면 사파이어, 꽃에 갖다대면 꽃빛이다가, 갸웃 보면 영락없는 루비 카넬리안이다. 꽃분홍인가 하고 보면 어느덧 진주떨기로 변하고 돌아보면 어! 다이아몬드, 조화가 자유자재 무궁무진이다. 내 하나 인간의 옹졸함과 한계로 언감, 말이 막히고 숨이 찰 따름이다.

    이는 분명 내게 애지음의 감격이며 크낙한 정서의 분출이다. 이런 것을 일러, 참다 참다 드디어 뿜어내는 봄날의 입김이라 해두자. 감격의 눈물방울, 나와 자연의 교감이며, 교감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묵언하는 감동이라고 또 불러두자. 이 맑게 닦은 수정이다가, 풀빛이다가 꽃빛, 하늘빛이다가 봄빛 모두 싸잡아 담은, 자연의 빛무리. 내 잔학의 말문을 막는 아름다워서 더욱 미운 눈짓과 손짓이라 불러주면 안 될까. 새색시 혼행길, 길나서는 데 길잡이 봄바람의 살폿한 애교라고 해둠도 괜찮겠다.

    이 길을 걸어 오르며 내리며, 내 생각을 쌓으며 무느며, 담아낸 봄의 맛과 멋들이 어쭙잖은 내 글의 씨앗이 되어 싹을 틔우고 꽃도 피운다. 나를 위한 천주산 약수터길의 베풂이며 다감한 손잡음이다. 시멘트 벽돌의 구속에서 벗어나 하늘을 볼 수 있고, 흙내음 풀내음을 맡으면서 세상을 제대로 살고 있는 자연의 속삭임도 들을 수 있다. 모처럼 내 영혼에 꽃물도 들여 주고 자연이 불러주는 노래로 숨 가쁜 도회의 번뇌도 짧은 시간이나마 잊을 수 있다.

    4월에 막 들어서면 이 길은 벚꽃 터널이 되어 풋풋하고 향긋한 봄을 만끽하게 한다. 꽃그늘이란 말을 실감케 하며, 그 그림자를 밟으면서 새삼 자연의 솜씨에 놀라게도 된다. 본격적으로 작고 큰 꽃 잔치와 봄 잔치의 서막이 열리는 것이다. 문향만리(文香萬里)에 화향만리(花香萬里)를 덧대어 중얼거리게 한다. 알량한 내 시심에 성냥개비를 좍 그어 불을 댕겨 준다고 과장해도 무방할 것이다.

    석불사 아래 돌개울 건너 언덕빼기에 합환목(合歡木) 한 그루가 곁눈질을 보낸다.



    양반 댁 후실을 닮은 자귀꽃 만개 한다

    닫아서 더욱 부푸는 속가슴 얼비치고

    주고도 넉넉한 사랑 목덜미가 희어라



    홀로된 누님을 닮은 자귀꽃 비 맞는다

    갈가리 찢어진 가슴 앞섶에 흐르는 눈물

    청춘을 톱아낸 사연 살몸 이리 아파라

    -‘지귀꽃 변주’ 전문



    약수터 가는 길의 가을은 사뭇 봄과 달라서 내 오붓한 정서에 다소곳한 돌림잔을 건넨다. 가을꽃이 피고 지고, 상수리 열매가 익어 떨어지기 시작하면 눈알이 유난 새까만 청설모가 바쁘게 나뭇가지를 오르내린다. 보는 것마다가 정겹고 가슴에 와서 붙는가 하면, 건듯 부는 바람이 내 삶의 허심을 집적대기도 한다. 추사비(秋士悲)- 선비를 슬프게 하는 계절이 가슴속 엎드려 살던 향수를 건드릴라치면 내 영혼도 한 번쯤 방목되어 봤으면 하는 충동을 느낀다.

    봄 이슬이 황홀경의 풋풋한 꿈을 키운다면, 가을 이슬은 아무래도 사색의 뭉클하는 추억을 불러온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잊고 살아온 고향의 한적한 길, 날마다 붙어살다시피 한 살동무들, 이 모두가 이 가을과 더불어 내 생각의 돌확에 물을 채워준다. 이것이 봄맛과는 다른 가을이라는 계절의 청량미는 아닐까. 알게 모르게 계절의 굽이마다에는 내 삶의 의미와 또 다른 가치가 숨어있었구나 하는 생각이다. 나무에 나이테가 하나 감길 때에 내 얼굴에 주름살도 하나 깊어질 것, 이는 분명 슬픈 일이다. 그러나 가을은 나를 그냥 세월만 먹고 흘려보내게 놔두지 않는다. 가을이라는 계절의 힘과 매력은 따로 있나 보다.

    일찍 떨어진 나뭇잎들이, 산들 스치는 바람에도 바슬바슬 사각사각 속삭이는가 하면, 조석으로는 으스스 바람이, 계절이 깊어진다고 일러주기도 한다. 봄 한 철 다투어 돋아나고 피어나서 여름 한 철 그렇게도 감고 돌던 임의(林依)-칡넝쿨, 다래넝쿨, 땅비싸리들까지 제 분수만큼 격에 맞춰 물이 드는 계절. 그럴 때면 예사로 보아 넘겼던 편백나무와 소나무의 무던한 품이 단연 돋보여 지조와 절개, 선비의 일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벚나무의 진홍색 가을 단장은 내 사념을 별도로 붙들어매는 힘이 있다. 내게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내 언제 봄꽃을 피웠더냐’는 듯이 가을단장을 진하게 하고 나선다. 좀 비싼 화장품을 좀 많이 찍어 발랐으리라. 이럴 때는 멀리 있는 감나무와 손닿을 데 길로 자란 굴참나무도 당연히 한몫 거든다. 바람에 밀려 구르는 나뭇잎 소리에 섞여 나오는 새소리엔 슬픔이 묻어 있다. 봄에 우는 새소리를 노래 부른다고 한다면, 가을 새의 노래는 운다고 일러줌이 옳겠다. 이 아릿자릿이 바람에 구르는 나뭇잎을 어찌 그냥 보내랴.



    혀끝에 감겨드는 녹차의 여운 같은

    봄처럼 피어오른 여인의 향기 같은

    안으로 익는 살내음을 나는 알고 있는가



    해마다 이맘때면 무심히 뜰을 걷다

    버릇되어 쓸쓸하게 낙엽을 쓸지마는

    참말로 쓸어야할 것을 나는 쓸고 있는가

    -‘낙엽을 쓸며’ 전문



    겨울이 만장일치로 수북한 눈을 몰고 와서 왜장을 친다는 소식이 빗발치듯 한 날도, 내가 오르내리는 이 천주산 약수터 길은 아름다운 이 고장의 계절에 낙엽을 깔아, 이냥 당당한 약수터 가는 길로 버틴다. 나는 이 풀과 나무와 새소리와 벌레 울음 한 소절에도 미련과 관심을 버리지 못한다. 시장기로 꽉 찬 내 영혼의 문을 열고, 가슴의 눈으로 바라보고, 영혼의 귀로 듣게 하는 길이다. 이 살아있는 계절의 매력을 잊을 수가 없다. 이 무구(無垢)와 영원은 헐렁한 내 글의 울타리가 되고, 든든한 지킴이로 야무진 뿌리를 내리게 한다. 내 시심을 추슬러 시 정신을 한결 맑고 투명하게 한다.

    하막녀가 심량강가에서 백낙천을 만나 심중을 털었듯이, 이 불녕(不)은 창천(蒼天) 아래에서 피워 올린 꿈을 상천(上天)의 사랑에 오롯, 담아붓는 것으로 붓을 달랜다.

    <홍진기 약력>

    △1936년 함안 출생 △1979년 현대문학 천료 △시집 ‘거울’, ‘빈잔’ 등

    △국제펜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고문



    <김관수 약력>

    △1956년 고성 출생 △개인전 15회 △경남사진학술연구원 원장, 대구예술대 사진영상과 겸임교수, 경남국제사진페스티벌 운영위원장, 한국사진학회 이사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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