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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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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든건 마라톤과 창원"…창원김씨 시조 김창원

2003년 입국한 부룬디 출신 '난민 마라토너'로 전국적 명성
아프리카 부룬디 출신 ‘한국인’ 김·창·원 씨
2003년 육상대회 참가해 한국 첫발

  • 기사입력 : 2014-08-0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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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위아 차량부품생산관리팀에서 근무하는 김창원씨가 수출 관련 업무를 보고 있다. /성승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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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 조그만 나라에서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스포츠대회에 혼자 출전해 안정된 한국의 모습에 반해 남기로 굳게 결심한다. 그래서 낯선 땅에서 어렵게 살면서도 난민 신청을 해 지위를 획득한 데 이어 귀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당당한 한국인으로 거듭난다. 특히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겪게되는 어려움 등을 잊고자 평소 재미로 했던 달리기 덕택에 출전하는 마라톤 대회마다 우승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도 날린다. 귀화 후에는 낮에는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에는 틈틈이 공부해 대학과 대학원 과정도 마치고 자신의 더 큰 미래를 꿈꾸고 있다. 아프리카 부룬디 출신으로서 한국인으로 귀화한 김창원(37·부룬디명 버징고 도나티엔)씨에 대한 얘기다. 



    김씨가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1년 전인 지난 2003년 8월. 부룬디 국제대학 3학년이던 그는 당시 대구 유니버시아드 육상경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감독, 코치도 없이 혼자 대학생 대표로 들어온다.

    김씨는 한국땅을 밟으면서 생명의 위협과 어둠 속에 늘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부룬디에서의 삶과 달리 안전하고 밝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너무도 꿈꿔 왔던 삶이었던 것이다. 대회 기간 중 한국에 난민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신청하게 된다.

    그가 자라난 부룬디는 아프리카 동남부에 있는 나라(인구 1000만명)로, 1962년 벨기에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1993년 종족 분쟁이 발생, 3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평범하고 행복한 고등학생으로 살아가던 그는 내전의 소용돌이에 부모님을 잃고 살 터전마저 빼앗긴 뒤 온갖 위협에 시달렸다. 두 형과 두 동생 등 5남매의 셋째였던 그는 형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학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처음 난민 신청을 하고 난 뒤 말도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서울의 한 박스 제작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인쇄소 직공을 시작으로 시계공장, 카메라 렌즈회사 등을 다니며 체류연장을 5번 넘게 거듭한 끝에 2005년 6월 난민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난민 인정은 받기 쉽지 않지만(신청자 대비 5.3%) 부룬디에 돌아갈 경우 신변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까다롭던 난민 관련법이 개정된 것도 도움이 됐다. 난민신청 1년8개월 만이다.

    그는 “난민을 인정받기 전에 생계를 위해 한국 문화나 언어 등 기본적인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바로 일을 하고 나니 소통의 어려움이 많았다”면서 “난민들이 보다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졌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한국에 온 후 외롭고 어려운 생활이 계속됐지만 그럴수록 유일한 즐거움이자 탈출구와 같았던 마라톤에 더 빠져들어 마라토너로 이름을 날리게 됐고, 이것이 그의 삶에 큰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2004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한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현대위아 마라톤 동호회 회원들과 만남이 그것이다. 이들의 주선으로 2005년 현대위아 사원으로 입사하게 되면서 창원으로 오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주어지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었는데 그런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을 회사에서 높이 평가한 것 같습니다.” 입사 후 지금까지 현대위아 차량부품생산관리팀에서 제품 수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회사에서 생산하는 자동차 부품들을 해외로 공급하기 위해 통관 등 필요한 제반 업무를 처리하는 일이다.

    현대위아에 입사한 후 1년에 7~8차례 마스터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잇따라 1위에 오르며 ‘난민 마라토너’로 명성을 이어간다. “마라톤을 하는 동안 잡념을 잊고 오직 그 순간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라토너들은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마라톤을 잘하는 비결은 끝없는 연습과 훈련이다”고 강조하는 그는 봄과 가을에는 출근 전후로 1시간 이상씩 일주일에 4~5일 정도 연습한다. 꾸준히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훈련하고 연습하면 점차 나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마라톤의 묘미라고 한다.

    그는 정규 마라톤 코스를 최고 2시간18분대에 주파하는 국가대표급이다. MBC한강 마라톤 7연패, 서울 동아마라톤 3연패, 아디다스 킹오브로드 우승 등 다수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현대위아 입사 후 생활이 안정을 잡아가자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소망이 생겨 2009년 9월 귀화시험에 응시한다. 그는 “난민 신분이라 무엇을 해도 불안했죠. 밤에 마음놓고 거리를 다닐 수 있고 나를 친절하게 대하는 한국에 정착하고 싶었다”며 신청 배경을 설명했다. 귀화시험 응시 후 1년 뒤인 2010년 11월 합격통지를 받고 한국 이름을 김창원이라고 짓는 등 당당한 한국인이 됐다.

    “창원은 내가 처음으로 한국에 정착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 도시입니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성인 ‘김’씨, 그리고 내가 정착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받아준 고마운 도시 ‘창원’을 더해서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창원 김씨’의 시조로 더욱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귀화신청을 한 직후인 2010년에는 경남대 경영학과에 편입해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또 창원에 정착하기까지 많은 도움을 준 경남이주민 노동복지센터 부설 다문화 어린이도서관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다문화 사회 정착에 작은 도움이나마 되고자 후원과 홍보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에 들어온 지 벌써 10년이 흘러 한국말도 잘하는 등 완전 한국인이 된 김창원씨. 그는 회사 업무를 열심히 하면서 한국과 부룬디 두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무역과 문화교류, 국제구호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싶단다. 오늘도 서두르지 않고 목표를 향해서 차근차근 발걸음을 내딛는 그에게서 삶을 마라톤처럼 즐기면서 달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명용 기자 my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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