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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학의 텃밭] (10) 강희근 시인

촉석루에 핀 아늑한 안개 그속에서 난 시를 품었네

  • 기사입력 : 2014-08-19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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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근 시인이 지난날 박용수 시인과 술잔을 기울이며 아늑한 안개를 거느렸던 촉석루에 서 있다./김관수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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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강희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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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 시인이 그의 풍경시류의 바탕이 돼 준 남강을 뒤로하고 서 있다.


    1. 나는 1969년 진주 장대동에서 셋방살이할 때 시 ‘촉석루’를 썼다. 대학 재학중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대학을 졸업하고는 천안에서 1년간 고교 교사로 있다가 중·고등학교를 다닌 진주로 와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한 해쯤 지난 9월 어느 날이었다. 밤 11시를 넘어 자정으로 드는 어우름에서 전등을 끄려는 순간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가새--” “가새--”라는 소리로 사람을 불러댔다. 나는 직감으로 나를 부르는 소리로 알아들었다. ‘가새-’는 ‘강선생’이라는 말일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보니 같은 장대동에 사는 갓 통성명한 고교 선배 박용수 시인이었다. 그는 1960년대 진주의 젊은 동인회 ‘흑기’를 이끌던 토박이 시인으로 어릴 때 청력을 잃고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진 기사였다.

    그는 뭐라 뭐라고 손짓 발짓으로 웅얼거리는 말을 보충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때의 말귀도 알아들었다. “이 좋은 밤에 방에 처박혀 뭐해, 나를 따라오라고, 깊어가는 밤에 술이나 한잔 나누자고” 그래 따라갔더니 촉석루였다. 진양호를 금방 조성한 때였으므로 안개가 진주성을 뒤덮고 백사장까지 내려가 강변을 끼고 흘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촉석루 경내가 안개로 가득한 것이 좋았다. 자욱한 안개는 처마 아래 잘름거리는데 촉석루가 안개를 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촉석루에 올라 박 시인이 들고 온 오징어 다리를 안주로 소주를 비우면서 두 사람은 아늑한 안개의 주인이 되어갔다.

    2. 한 두어 시간 되었을까. 집에 돌아와 쓴 ‘촉석루’는 다음과 같다.

    “그 밑에 밤안개를 치고 있다// 왜(倭) 바람의/ 그 왼짝 발 도포(道袍)자락으로 말아/ 쥐고 있다// 비봉(飛鳳)이여/ 그대의 우르르 우르르/ 한 뙈기 수염이 몰려오고// 몰려오는 한 뙈기/ 수염/ 그 밑에 밤안개를 치고 있다.// 선조(宣祖) 이후다”

    이른바 나의 풍경시류 중에서 대표작이 된 것인데 감각과 절제가 시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이 시를 쓸 무렵 나의 초기시는 ‘산에 가서’(데뷔작)의 서정과 ‘연기 및 일기’(공보부 신인예술상 수상작)의 ‘의식의 흐름’이 대칭을 이루고 있어서 이 둘을 통합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정과 내면을 하나로 묶는 변증법적 통일이 과제였다. 두 개의 기법이 한 사람에 의해 동시기에 실험되고 있는 것을 보고 김현승 시인은 놀라운 일이라 했지만 나는 칭찬으로 들어 넘길 수가 없었다.

    ‘촉석루’가 ‘월간문학’에 발표되자 평론가 김주연은 “시가 무엇인지를 아는 짜임새 있는 작품으로 거의 완벽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국제신보 월평 73. 2)고 평했다. 그런 뒤 시집 ‘풍경보’ 해설에서 그는 “진주시인 강희근씨가 세 번째 시집 ‘풍경보’를 내놓는다. 내가 이 시인의 작품을 읽은 것은 바로 이 시인이 살고 있는 마을의 지신(地神)과도 같은 저 ‘촉석루’라는 시였는데 김춘수의 어느 것과도 비슷하고 박용래의 어떤 것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는 말로 풀어나갔다.

    이래 저래 ‘촉석루’는 나의 초기 시를 교통정리해준 하나의 전기가 되어 주었다. 시의 컬러도 살리고 지역도 사랑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 시는 촉석루를 초점으로 잡으면서도 저만치 떨어져 있는 진주의 주산(主山)인 ‘비봉산’을 함께 끌고 가는 배려를 했다. 한 대상으로 지역을 한 묶음으로 해석하는 구도인 셈이었다. 시에서는 풍경이면서 메시지를 깔았다. “임진왜란은 끝났지만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왜란은 지속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현재의 촉석루는 ‘왜(倭 )바람의 왼짝 발’을 붙들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최근 나는 ‘퇴근길’을 써서 그 메시지를 되풀이해 놓았다.

    “다락은 불타고도 다시 돌아와 아스라이 강 건너 솟은/ 산노을을 베고/ 노을이 다시 흐르는 강 아래 어둠을 베는데/ 조정은 예나 이제나 제 글자 짚으며 장계 읽는다는/ 소식이 멀다”고 썼다. 촉석루에 일찍이 열아홉살 짜리 다산(茶山)이 장인을 따라 오른 뒤 “오랑캐가 해동을 노려본지 얼마련가”고 우려했던 구절을 연상했던 것이다.

    3. ‘촉석루’를 쓰게 한 선배 박용수 시인은 작품이 발표될 무렵 시 ‘퇴거증’을 쓰고 진주살이를 청산했다. 그가 서울로 가 ‘허바허바 사장’의 기사로 일하다가 서울 장위동에다 사진관을 차렸다. 그러다가 전업시인이 되는가 했는데 어느새 사전 편찬에 생애를 걸었다. 우리말을 갈래별로 분류하기 시작해 1989년 ‘우리말 갈래사전’을 펴냈고 이어 ‘우리말 역순사전’, ‘겨레말 갈래 큰사전’ 등을 펴냈다. 시인은 움직일 수 없는 국어학자가 된 것이다.

    진주 장대동은 박 시인이 터 잡은 데지만 그 앞에 ‘지리산’ 소설가 이병주가 진주시절(1945~1955) 요정이 범람해 넘어오는 경계지점 장대동에서 살았다. 그때 그는 열심히 장편 대하의 세계를 꿈꾸고 있었다. 그의 중편 ‘마술사’는 그 장대동 집에서 쓴 것으로 알려졌다. 소설의 주무대는 미얀마이지만 그다음으로 일본 전역과 우리나라 서부경남의 두 개의 읍(K읍, S읍)으로 이동한다. 장대동에 앉아서 아시아 전역으로 앵글을 넓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광역권 작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진주 장대동은 리명길, 정혜옥, 허남벽(재독 시인 허수경의 아버지), 박용수, 김여정, 최용호, 손상철, 정재필, 조정남, 신찬식, 이영성 등 작가 시인들의 세거지로서, 둑이 낮아 물난리를 자주 만나면서 질긴 시심을 키워나간 곳이다. 이른바 이병주를 포함한 ‘장대동 사단’을 거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석에 나의 ‘촉석루’가 머리 풀지 않은 새색시처럼 버선발로 입장한 것이라는 느낌이다.

    4. 나의 고향은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다. 그곳을 배경으로 쓴 ‘산에 가서’라는 작품이 나의 등단작이 되었다. 내게 서정이 흐른다면 그것은 그곳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후 생애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진주는 어디를 잘라놓고 보아도 풍치를 이루는 격(格)이 있는 곳이다. 역사에서나 교양에서나 어디로 기울어져 망가지지 않게 하는 하나의 액자처럼 기본이 되는 곳이다.

    내가 끝까지 시심에 불타오르고 지금이 전성시대라고 말하게 하는 힘, 그것은 뭐라 정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산과 물이 살아서 흐르는 지역의 힘이 아닐까 한다.

    “천 길 벼랑에 백일홍/ 가락지 모양으로 피다/ 피는 네 모양의 가락지 하나로 산/ 가락지 하나로 노을/ 가락지 하나로 바위/ 가락지 하나로 또/ 하늘을 갈아 끼다/ 손가락 열이 열 번을/ 바꾸어 갈아 끼자 백일홍 꽃빛/ 단청이 되어 들보의/ 몇 군데 그려져 남다”(논개 사당의 단청)

    촉석루 벼랑에 백일홍이 가락지 모양으로 피고 그 가락지는 산과 노을과 바위와 하늘을 갈아 끼고 있다는 것이다. 논개의 정신이 하늘과 땅과 물을 하나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 나는 그 하나의 흐름으로 흐르고 있다. 진주에서 시를 쓴다는 일은 그렇게 흐르는 것이다. 그것도 푸르게 흐르는 것이다.




    <강희근 약력>
    △1943년 산청 출생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 당선으로 등단 △시집 ‘연기 및 일기’, ‘풍경보’ 등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김관수 약력>
    △1956년 고성 출생 △개인전 15회 △경남사진학술연구원 원장, 대구예술대 사진영상과 겸임교수, 경남국제사진페스티벌 운영위원장, 한국사진학회 이사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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