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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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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한 권의 책- 윤봉한(윤봉한치과의원 원장)

  • 기사입력 : 2014-09-16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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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어본 음식 중 가장 맛있었던 것을 한 가지만 들어보라든지, 제일 좋았던 여행지를 꼽아보라든지, 좋아하는 음악을, 영화를, 계절을, 색깔을, 그리고 인생의 책 한 권은 무엇이냐는 등의 질문은 비록 질문 자체는 문제없지만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기대는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일이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그런 걸 진짜로 진지하게 기억하는 그런 지루한 종류의 사람이라면 왠지 그가 할 대답 또한 기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데이트에서는 대개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라고 생각한다. 자신 없다. 왜냐하면 내게 첫 데이트는 너무 오래전 일이다). 질문을 다시 받아 본 것은 보스턴 출신의 원어민 영어 교사에게서였다. 잘 훈련된 선교사처럼 그는 준비된 매뉴얼로 색깔을, 계절을, 영화를 등등 비슷비슷한 질문(괄호 속 몇몇 단어만 바꾸면 되는)을 몇 번에 걸쳐서 하곤 했다. 헤어진 지 오래지만 그의 단순한 질문과 내가 한 멍청한 답변들이 상처처럼 기억에 남아 있었나 보다.

    그러니 이제 따분한 날엔 가끔 스스로에게 이런 터무니없는 질문을 하곤 한다.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은 무엇일까?’

    답으로 그때 보스턴 선교사에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말했지 싶다. 20대를 지나갈 무렵 좋아했던 책이다. 노벨상을 받기 전엔 읽은 사람도 많지 않아 슬쩍 폼 잡기 좋은 책이기도 했다. 아니다 어쩌면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한 권의 책으로 꼽았을 수도 있겠다. 읽고 나서 미쳐 한때 소설 쓴다고 깝죽대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아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 손 닿는 곳에 두고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와 함께 따분할 때면 늘 다시 꺼내보던 책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말하라면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다.

    ‘종의 기원’은 많은 고전들처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읽어본 사람도 많지 않은 책일 것이다. 나의 경우 ‘종의 기원’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박성관이 쓴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이란, 일부러 외울 수 없게(?) 붙인 것 같은 긴 제목의 해설서 덕분이다(다윈의 ‘종의 기원’도 실제는 ‘자연 선택 또는 생존 경쟁에 있어서 유리한 종족의 보존에 의한 종의 기원에 대하여’란 긴 제목이다). 아무튼 박성관의 책은 인문학 전공자인 저자가 여러 진화 생물학자들의 저작들을 공부하면서 얻은 지식과 생각들로 다윈을 독파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이 글을 읽으면서 ‘종의 기원’에 관심이 생긴다면 이 책 대신(박성관씨 죄송) 스티븐 J. 굴드가 쓴 ‘다윈 이후’를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이기적 유전자’를 쓴 도킨스와는 달리 독선적이지 않으면서(도킨스씨도 죄송) 힘들이지 않고 다윈의 생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윈 이야기를 꺼낸 것은 가을이니까 바늘에 실처럼 책이라는 핑계로 잠시 시간을 내서 인간 혹은 생명의 본질을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마음에서다. 본질적 허무가 어쩌면 여러 가지로 힘든 오늘을 버티는 역설적인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없었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종의 기원’은 생명은 모두 하나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것이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리란 종교적 위안의 말도 가히 틀리진 않을 것이다. 2014년 9월이다. 나부터 스스로에게 위로가 필요한 시간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윤봉한 윤봉한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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