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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학의 텃밭] (12) 전문수 시인

田文秀 채찍이 된 내 이름 석자
月海 문학이 된 달빛 진해바다

  • 기사입력 : 2014-09-17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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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할머니의 삼자보감(三字 寶鑑)

    때로 나는, 나의 삶의 문제를 내 스스로가 굳이 물어봐야 할 절실함이 올 때면, 내가 나를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위대한 절대존재에 의해 만들어져 이 세상에 내보내졌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하곤 한다. 무슨 임무를 받아 심부름의 영을 다하는 것을 우리는 사명(使命)이라고 하듯 내 의사에 관계없이 절대자가 명한 내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특히 좀 별난 내 이름 3자 때문에 이런 침잠의 숙고에 자주 들어 내 사명을 많이 되뇌었다.

    전문수(田文秀)라는 세 한자를 소위 삼자성어(三字成語)의 보감(삶의 보배로운 귀감이 되는 문구)으로 보고 의역하면 “밭에 글이 아주 뛰어나게 잘 커 있다”는 뜻이 되는 바, 바로 3자 금언이 되는 것이다. 마치 내 생명체의 이념처럼 이 사자성어는 내 사명 내지 운명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이 감히 감당 못할 내 이름은 할머니께서 할아버지를 우겨서 지어주셨다고 했다. 나는 삼대에 걸친 가난하지만 자존심 강한 지방 백수 유림 처사 조부님들의 한문 문화 속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반다지 가구의 서궤에는 한서가 가득 있었다. 나는 5살 때 할머니 등에 업혀 서당에 가서 천자문을 외었고 이어서 할아버지께서 필사해주신 <동몽선습> 책을 첫 구절부터 외워가며 그 어려운 천륜지도를 6세 아이가 앵무새처럼 새겨가야 했다. 이어 귀결, 시전, 서전, 동인시, 두문록식, 통감 등이 세상 물정 전혀 모르는 어린애의 베갯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를 친구들보다 1년 반 늦게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타계하시기까지 나는 태어나서부터 22세가 될 때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을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교사 발령을 받아 부임하는 곳까지 할머니는 셋방을 얻어 내 밥을 손수 지어주셔야 마음이 편하셨다. 할머니는 당시 한자를 읽으시는 드문 어깨넘어 유식이었지만 문학은 전혀 모르셨다. 무턱대고 자기의 시조부와 시부모처럼 알아주는 문장의 뒤를 반드시 이어야 된다고만 생각하셨다. 문장깨나 읽는 초성소리가 집안에서 울려 나와야 된다는 맹신이 할머니의 손자에게 바란 전부였다.

    내가 국어국문학 박사가 되고 고시문을 겨우 흉내 내며 초성 좀 살려 풍월을 읊는 것은 모두 할머니가 주신 3자 성어 내 이름의 압력 덕이었다. 그래서 비록 못난 글쟁이라도 된 내 문학의 텃밭은 ‘할머니의 가슴’이고 할머니가 내게 주신 3자 보감어 ‘전문수(田文秀)’라는 문장 한 구절이다.

    제 얼굴의 때를 살펴보려면 거울을 보듯 나는 할머니가 주신 전문수라는 3자 성어에 내 얼굴을 비추어서 내 사명을 다스렸다. 문수(文秀) 이름은 전국적으로 거의 없다. 문수보살의 문수(文殊)라는 이름들은 많이 있다. 할머니는 아예 내 이름을 실천적인 잠언으로 주신 것이었다. “늘 글이 뛰어나라”는 금언의 말씀을 이름으로 주신 것이었다. 누구도 못 꺾는 할머니의 소신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거의 3년을 할머니의 그리움에 대한 병적 슬픔으로 힘들어했으며 고독해했다. 당시 유일한 순문예지 <현대문학>지를 끼고 산 때가 이때였다.

    나는 누구도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만으론 만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나 밖의 위대한 어떤 절대이념 같은 것이 지배한다는 생각이 짙다. 문학은 특히 수천 년의 보감(거울이되 보배로운 글)이 고전으로 쌓이고 자연의 천리가 에워싼 속에서 이뤄지는 끝없는 새 보감의 창조라고 본다. 이런 입처(入處)가 요즈음 천문이라는 내 경전이다. 내가 태어난 것 역시 천문이고 할머니가 주신 내 이름도 천문인 것이다. 어떻게 이런 천문들을 읽어내고 해석해 내느냐가 내 문학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2. 월해(月海)의 취월농월

    내가 대구에서 고등학교, 전문대학 등 근 20년 교직 생활을 하다가 창원대학교 첫 개설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온 것은 1980년도이었다. 지금의 진해 원포(수치마을) 바닷가에 새 터를 잡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어느 날 술친구의 소개로 겨우 두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산 고개를 어렵게 넘어 작은 어촌 마을에 바다 구경 갔다가 바다와 달빛과 회 안주로 마음도 몸도 취해서 그만 즉흥으로 터를 잡은 곳이다. 그 후 나는 마음을 달과 바다에 빼앗겨 월해(月海)란 호(號)를 다시 새 이름으로 얻었다. 분명 이 별명은 달과 바다가 지어 준 것이었다.

    <농월>

    어느 보름날/ 하늘과 바다 사이에/ 만월로 뜬 달 보며/ 나는 취월농월取月弄月했네

    위로 보면 月天/ 아래로 보면 月海/ 더 위로 보면 天月/ 더 물 아래로 잠긴 달은 海月

    문자깨나 뒤집으며/ 취월농월해 보지만/ 더 멋있을 법한/ 꼭 그 한 말을/ 아직 못 찾는데,

    달은 달일 뿐이라며/ 성철 스님 같은/ 바닷새 한 마리가/ 장천의 내 농월을 지우며 날았네.



    <바다에 와서>

    용케도 바닷가에까지 와서/ 띳집이라도 짓고 보니/ 문득 나는 백두대간/ 어느 산골 작은 바위틈에서/ 발원한/ 옹달샘 물 같다

    실 줄기 같은 물줄기가/ 어느 거친 노들 변에/ 벌써 스며들어 흔적조차/ 잃을 법한 일인데

    도랑물을 만나고 강물에 끼어/ 여기 땅 끝 바닷가에 다다랐으니/ 이제 어디로 더 가겠는가/ 강물이 바다에 이르러/ 비로소 소금이 되듯/ 그리 나도 살아야겠네.



    원포의 달바다(월해)는 전문수라는 텃밭 위에 다시 33년간의 내 문학 텃밭이 되고 말았다. 나름대로 좌청룡 우백호와 주작이 갖추어졌다고 본 천혜의 내 시야는 그야말로 또 하나의 내 천문 공간이 되었다. 나는 남은 생, 여기서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전문수의 문학을 좀 더 가꿔서 끝나는 어느 날, 다시 할머니 품에 들어 내 한 생을 고하려 한다.

    <전문수 약력>

    △1937년 의령 출생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197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1980년 <현대문학>지 문학평론 천료 △시집 ‘천문’ △창원대학교 명예교수, 의령예술촌 명예이사장



    <김관수 약력>

    △1956년 고성 출생 △개인전 15회 △경남사진학술연구원 원장, 대구예술대 사진영상과 겸임교수, 경남국제사진페스티벌 운영위원장, 한국사진학회 이사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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