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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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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이은혜(이은기업교육·미술치료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 2014-09-26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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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아침 일찍 눈을 떠 무학산을 올랐다. 올여름 유난히 내린 비로 계곡 물은 시원하게 흘러내린다. 무엇 하나 부끄러운 것 없다는 듯, 깨끗한 속내를 말갛게 내비치는 냇물이 ‘네 꼴을 보라’고 야단치는 것 같기도 하고, 흐르는 시냇물에 답답한 마음을 씻어버리라고 위로해 주는 듯도 하다.

    냇가에 내려서니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뭇잎들이 물빛 속에 빗물처럼 후두둑 흩뿌려진다. 어디선가 날아 든 가을향기가 코 끝을 스치고 아, 벌써 잎이 지고 가을인가 싶어 마음 한구석이 스산하다. 어릴 적엔 꽃이 흐드러진 봄이 지루하다고 앙탈을 부렸는데 언젠가부터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는 게 싫어진다.

    잎이 지고 바람이 이는 가을의 풍경을 마음 놓고 즐길 수만은 없는 것은 내 인생에도 가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일까?

    간혹 황혼에 접어든 노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면 삶에 대한 열정과 집착에 당혹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왜 그렇게 죽음에 대한 언급을 싫어하는지 참 어리석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분들의 대답은, “죽음이 너무 가까이 와 있기에 실감 나서 싫다”는 것이었다. 그러게,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이제 잘 죽을 준비를 하라는 강사의 시건방이 얼마나 얄미웠을까?

    여름을 지나 어느새 다가와 있는 가을을 마주하니 중년을 넘어서면 빛의 속도로 달린다는 세월의 빠름을 절감하게 된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라는 동화 제목처럼 나에게도 그런 날이 다가올 것을 생각하니 쓸쓸해진다.

    한편으로는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듯 눈을 멀뚱거리며 나의 강의를 듣던 노인들처럼 죽음이라는 단어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그려지면서 평소 ‘웰 다잉’을 떠들어대던 위선이 조금 코믹하기도 하다. 가톨릭 성가의 한 구절처럼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일 뿐이건만 찰나를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은 채 늘 허둥대며 수선을 떠는 내 꼴이 그분은 얼마나 안쓰러웠을까?

    그래서 오늘 아침엔 가을바람을 데려와 놀게 하면서 내게 인생의 겸손을 가르치고, 사는 동안 낙엽처럼 예쁘게 물들며 살라는 한 말씀을 주시나 보나.

    상담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자신을 상처내거나 타인들로 인해 덧난 가슴을 안고 찾아온다. 우리는 모두 이래저래 환자이다. 소중히 여겨야 할 자신에게 ‘너는 이런 이유로 사랑받을 수 없고 저래서 인정받을 수 없다’고 수없이 자신을 비난하곤 한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할 수 없으니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할 줄은 더욱 모른다.

    더 안타까운 일은 돈이 되는 일엔 계산이 밝지만 제 인생의 시간들이 좀 먹는 것은 좀처럼 살피지 못하는 외눈박이 눈을 가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가족과 지인들에게 생채기를 내면서도 사랑하니까 이해해야 한다고 어깃장을 놓고 강요하는 사랑의 파시스트이자 강박증 환자인지도 모른다.

    이 가을, 절대 끝날 것 같지 않은 우리의 길도, 고통도 나뭇잎이 떨어지듯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것을, 지금 내 옆에 있는 소중한 인연들도 언젠가는 헤어진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면 우리가 지은 원망의 집을 부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인생의 마지막을 앞둔 사람들은 ‘타인의 기대보다는 내 마음을 돌보고 살았더라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사랑한다고 표현하며 살았더라면…. 하고 후회한다고 한다. 이참에 나도 마음 밭 깊은 곳에 시 한 포기 심어야겠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이은혜 이은기업교육·미술치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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