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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1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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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하나 없이 인공암벽 오르는 스파이더맨

[사람속으로] 히말라야 등정 중 동상으로 장애인의 삶 사는 전봉곤 씨

  • 기사입력 : 2014-10-07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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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곤씨는 지난 1988년 히말라야의 고봉 ‘눕체’를 등반하다 동상으로 손발가락과 코끝을 잃었지만 장애를 딛고 도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 전씨가 창원 대원동 클라이밍스쿨에서 손가락 하나 없이 인공암벽을 오르고 있다./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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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곤씨가 지난 1988년 히말라야의 고봉 ‘눕체’ 등반 때 찍은 사진을 보고 있다.




    반세기에 이르는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의 한 획을 그은 경남산악연맹의 1988~1989년 눕체 동계초등. 1988년 12월 2일 대원 11명 중 4명이 등정에 성공했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영하 30~40도의 혹독한 날씨 탓에 대원 모두 심각한 동상에 걸려 장애인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등반 이후 26년이 지난 지금 대원 중 한 명인 전봉곤(54)씨를 만났다.

    진주 금곡면 출생인 전씨는 대동기계공고 3학년 여름방학 때 ‘산에 가자’는 친구의 제안에 군용텐트 2동을 메고 지리산 등정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등산준비를 안 해 2박3일간 생고생을 했다. 그의 첫 산행이었다.

    고교를 졸업한 후 창원의 한 중견기업에 들어갔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동료의 권유로 마산 무학산악회에 가입해 산악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됐다.

    회사에서 동호회 활동을 장려하면서 사내 산악회가 생겼다. 부회장을 맡아 주말이면 전국의 산을 올랐다.

    전씨는 산악등반보다는 암벽등반에 소질이 있었다. 1987년 포항 보경사에서 열린 암벽등반대회에서 경남에서 최초로 3위를 차지했다. 부상으로 일본 조가사키에서 열린 암벽대회 참가가 주어졌다.

    이때부터 산악인으로서 그의 입지는 탄탄해졌다. 경남산악계와 회사에서 그의 등반실력을 인정해줬다. 이듬해에는 그의 실력을 높이 산 선배의 추천으로 경남산악연맹의 동계 눕체 원정대에 합류하게 됐다.

    그의 성실함으로 눈여겨본 회사에서는 눕체 원정 때 6개월간 유급휴가와 함께 300만원을 지원해줬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엔 8000m 이상 히말라야 고봉을 등반해야 알아줬어요. 눕체는 해발 7855m 높이라서 인정을 받으려면 뭔가 다른 의미를 부여해야 했어요. 그런데 겨울에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어 경남산악연맹에서 동계초등을 하기로 한 거죠.”

    뒤늦게 원정대에 합류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한 뒤 히말라야로 향했다. 티벳어로 ‘(에베레스트의) 서봉’이란 뜻인 눕체는 에베레스트의 남서 4.4㎞, 남체 바자르의 북동 25㎞, 로체에서 서쪽으로 뻗은 능선 5㎞지점에 있으며, 주봉을 중심으로 동서로 긴 산괴를 형성한다. 북으로는 쿰부 빙하의 원두인 웨스턴 쿰, 남으로는 임자 계곡쪽에 고도차 2000m의 대암벽을 이루고 있다.

    1961년 봄 영국대가 눕체 빙하에서 중앙릉을 거쳐 초등정했으나 그 이후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히말라야에 도착한 경남산악연맹 원정대는 베이스캠프를 비롯해 캠프 1, 2, 3, 4를 설치하고 곧바로 등정에 나섰다.

    1차 공격조가 등정에 실패하자 전씨를 비롯한 대원 4명과 셰르파(히말라야 산악 등반 안내인) 2명으로 구성된 2차 공격조가 2박3일간 도전을 시작했다.

    캠프4까지 오른 전씨 일행은 하룻밤을 자야 했지만 박스형 텐트가 비좁아 4명 모두 누울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작은 텐트는 셰르파 2명이 차지했다. 궁둥이를 붙일 만큼의 공간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전씨는 텐트 입구에 웅크린 채 문을 닫지도 못하고 혹독한 추위에 시달렸다.

    다음 날인 12월 22일 오전 3시 전씨 일행은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전씨에게 고소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복통과 설사증세로 인해 안자일렌(등산 중 안전을 위해 여럿이 서로의 몸을 로프로 잡아매는 것)을 풀어야 했다. 장갑을 벗고 용변을 본 후부터 손가락이 아려 왔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진 대원들의 발자국을 따라 혼자 산을 올랐다.

    일행보다 뒤처져 정상에서 20여m 지점까지 갔을 때 정상에 오른 뒤 하산하는 일행과 만났다. 안자일렌을 하지 않고 고봉을 등반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일행과 함께 하산하는 수밖에 없었다.

    2박3일간 하산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캠프4에서 하룻밤, 캠프 2에서 하룻밤을 자야 했는데 여전히 전씨가 누울 자리는 없었다. 이틀 밤을 고드름이 걸려 있는 텐트 입구에 쪼그려 앉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보내야 했다. 손발이 점점 딱딱해져 감각조차 느낄 수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해 보니 손발과 코끝이 새카맣게 될 정도로 동상이 심각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곧바로 병원에 실려갔다. 전씨의 동상 부위를 살펴본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간 눈물로 지새우다가 못 자른다고 버텼다. 용하다는 침술사에게 침을 맞기도 했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다시 병원에서 6개월간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동상에 걸린 손발과 코끝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떨어져 나갔다.

    사고가 난 지 2년 가까이 절망 속에 빠져 지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 같아 사람 만나는 것을 꺼렸다. 그 와중에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줬던 회사마저 그만둬야 했다.

    폐인같이 지내던 어느 날,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맨 먼저 개인교습을 받아 운전면허를 땄다. 그다음엔 전라도, 강원도 등 스키장을 수십 차례 다니며 스키를 배웠다. 처음엔 발가락이 없이 균형을 잡기 어려웠지만 열심히 노력한 끝에 다른 사람 못지않은 실력을 갖췄다. 독학으로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현재는 대동기계공고 OB산악회 회원으로 선후배들과 같이 등산하고 있으며, 실내암장에서 암벽등반도 하고 있다. 생계를 위해 1992년부터는 신문사 지국장을 맡아 신문 배달을 하고 있다. 처음엔 신문 사이에 전단을 끼우는 것이 서툴렀지만 지금은 능수능란하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됐다. 손가락 하나 없는 손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내보인다. 악수도 스스럼없이 한다.

    원래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사고 이후 스스로에게 당당했고, 그것을 주위에 알리기 위해 말이 많아지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그는 시련을 안겨준 눕체 등반을 지금까지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끝없이 불행하게 됩니다. 남들이 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어 저는 불행하지 않아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정하면서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양영석 기자

    yys@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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