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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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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천융희(시인)

  • 기사입력 : 2014-10-17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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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우주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라는 시의 부분이다. 시인의 상상력과 통찰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자연의 미세한 사물을 건드려 이처럼 우주를 발견하고 천국을 맛보는 것이다. 단순함에서 아름다운 진리를 찾아내려는, 이 짧지만 강렬한 한 줄의 글을 만난 곳은 메타쉐쿼이아 가로수길 어느 카페로 기억된다.

    마침 계절은 ‘바비예 레토(Babye Ieto)’를 지나는 중이었다. 바비예 레토란 무성한 녹음의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는 열흘 남짓 기간을 말한다. 더 높고 더 푸르러 청명한 날씨를 일컫는 러시아어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아름다운 틈새를 찾아다니는 버릇이 있다.

    카페 입구부터 시작해 산이나 들에서만 볼 수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토속적인 꽃들이 주인의 섬세한 배려로 가장 알맞은 자리에 놓여 자태를 끌어내고 있었다. 눈여겨보아야만 보이는, 쪼그리고 앉아야만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들꽃들을 호명해 보았다. 벌개미취, 층층이꽃, 쑥부쟁이, 바위구절초 그 맑은 얼굴 앞에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나도 모르게 읊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9월부터 개강하는 프로그램을 뒤척이다 결국은 들꽃 가꾸기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우리 집 한쪽 구석에는 짧은 내력을 털어 낸 빈 화분이 유독 많이 포개져 있다. 문득 목덜미가 뜨끔거리는 시 한 편이 생각났다. ‘벤자민과 소철과 관음죽/ 송사리와 금붕어와 올챙이와 개미와 방아깨비와 잠자리/ 장미와 안개꽃과 튤립과 국화/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공감 가는 유홍준 시인의 재밌는 글이다.

    야생화를 화분에 옮겨 계절과 관계없이 아파트에서 꽃을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듯했다. 과정별로 주의해야 할 점과 기본적인 지식도 필요했다.

    꽃 색깔과 크기를 고려해서 화분을 선택하는 일, 망을 잘라 배수 구멍을 철사로 고정하는 일, 다음으로 마사토를 채우고 밑거름과 웃거름 적당량을 주는 일, 그리고 뿌리의 흙을 털어 화분에 앉힌 후, 갓 심은 꽃은 반그늘에서 일주일 정도 적응시키는 일 등.

    지난 토요일, 가족과 함께 안민고개 벚꽃길 아래로 닦아 놓은 ‘진해 드림로드’를 거닐었다. 햇살의 등에 업힌 바닷바람이 비스듬한 산허리를 맴돌곤 했는데 그 바람에 혹시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 건 아닌지 몰라. 와중 “어디 보자, 어디 보자…” 오가는 길 위에서 아직은 서먹한 들꽃의 이름을 더듬어 보았다. 풀섶 위로 냉큼 얼굴 내민 노란 녀석, 바위 옆구리 콱 붙들고 파르르 떠는 녀석, 그리고 나무 그늘을 베고 누운 녀석들. 그 조그만 낯빛이 얼마나 고귀한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어떤 이론도 어떤 지식 없어도 스스로 낮추어 붉어지며, 저물 때 저물 줄 알고 소신 있게 사라지기도 하는 그들의 생이 이 가을 또 한 번 묵음으로 타오를 것이다.

    도통 바람이 들지 않은 실내 공기 탓인지, 두 개의 화분에 심겨진 녀석들이 벌써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아무래도 들꽃을 가꾸기는 내게 무리인 것 같다. 민망하게 담긴 흙을 빈 공터에 붓고 와야 할 형편이다. 한 송이 들꽃의 천국을 보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설 일이다. 이 가을에!

    천융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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