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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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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고양이 전쟁- 윤봉한(윤봉한치과의원 원장)

  • 기사입력 : 2014-10-2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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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이 넘은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다. 낡아서 불편한 점이 많다. 반면에 좋은 점도 있다. 동 간 간격이 넓은 것도 그중 하나다. 오래된 정원에 꽃이 피고 시간을 갖고 자란 나무들이 무성해 제법 그럴듯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게 별 거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또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것이 살아가며 살피는 관심의 중심이기도 하다.

    저녁마다 산책을 한다. 근래 새로 붙은 버릇이다. 늦어도 8시 반이면 단지의 서쪽에 있는 집을 나와 남쪽의 오솔길을 지나 지하철역이 가까운 동쪽 공원을 가로질러 단지 밖의 천변 길로 나갔다가 다리를 건너 돌아온다. 처음 시작할 땐 1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지금은 많이 줄었다. 거의 매일 쉬지 않고 일 년 반을 넘긴 덕분이다.

    산책을 시작하기 전엔 아파트에 고양이가 그렇게 살고 있는지 몰랐다. 아니다 몰랐던 것은 아니다. 반상회보의 민원란에서 보았다. 먹이를 주지 말자는 내용이었다. 시끄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늦은 저녁 무리 지은 모습이 좀 무섭다는 호소도 있었다.

    어느 날 처음 보는 검은 고양이가 길에 나와 있었다. 매일 저녁 비슷한 시간에 공원길을 오가다 보니 누가 누구와 가족인지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머리가 크고 얼굴은 넙데데했지만 몸매는 날렵했다. 중치로 봄에 태어나 이제 막 여름을 보내는 중으로 보였다. 길고양이 주제에 넉살이 좋아 아예 길을 막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앵앵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고양이에 앵벌이를 더한 앵냥이었다. 필살기 애교 덕분에 잘 얻어먹어선지 반지르르한 털이 검게 빛나는 그야말로 잘난 놈이었다.

    아내가 마트에서 고양이 먹이를 산 것도 그쯤이다. 저녁마다 비닐 지퍼록에 먹이를 넣어 호주머니 안쪽 깊이 챙겼다. 공원길에서 나무들이 우거진 안쪽으로 들어갔다. 반상회보 탓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때를 기다려 몰래 들어갔다. 고양이들이 모여 있는 어두운 공원 안쪽에는 의외로 고양이 먹이를 놓아둔 흔적들이 많았다. 일회용 접시에 가지런히 펼쳐진 비닐이나 신문지 그리고 통조림 등. 그동안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아파트 동쪽 공원에서의 치열한 고양이 전쟁의 흔적을 이사 온 지 20여 년 만에야 보게 된 것이다.

    앵냥이는 금세 공원을 평정했다. 녀석이 먹기 전에는 그 어떤 고양이도 먹이에 접근하지 못했다. 슬쩍 입을 댔다가도 얼른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고양이들의 세력 다툼은 생각보다 치열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청회색의 어깨가 그 자릴 차지했다. 주변을 돌던 앵냥이는 마침내 공원길에서 사라졌다. 길고양이는 대개 세 번의 겨울을 넘기지 못한다고 한다. 15년 가까이 사는 집고양이에 비해 길고양이의 환경이 그만큼 혹독하다는 것이다.

    며칠 전 남쪽 오솔길에서 앵냥이를 만났다. 반년이 넘었다. 남쪽은 고양이들이 살지 않는 곳이다. 나무가 많지 않아 몰래 먹이 주기도 힘든 곳이다. 그로선 광야로 쫓겨난 셈이었다. 측은하고 반가웠다. 집으로 돌아온 아내가 서둘러 지퍼록에 먹이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렇다. 지금 난 걱정이다. 남쪽 오솔길에 고양이가 모이면 주민들의 민원이 늘어날 것이다. 또 다른 고양이 전쟁이 시작될 수 있다. 그런데 며칠 사이 기온이 급하게 떨어지고 있다. 길고양이에게 겨울은 죽느냐 사느냐 운명의 시간이다.

    윤봉한 윤봉한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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