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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비경 100선] 대원군 친필 휘호 간직한 김해 만장대

어제의 가야에 올라 오늘의 김해를 보다
김해 역사가 고스란히 남은
323m 높이의 단아한 산

  • 기사입력 : 2014-11-27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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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군 친필 만장대 휘호.



    김해시 어방동에 있는 분산은 해발 323m의 고만고만한 높이의 단아한 산이다.

    분산으로 오르는 길은 완만하다. 부원동 김해시청에서 차를 달려 삼정동을 지나 10여 분이면 분산 입구에 닿는다. 분산의 초입은 일반적인 등산로와는 사뭇 다르다. 웅장하면서도 현대식으로 건축된 일주문이 산행객을 반갑게 맞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다. 일주문 옆에는 대리석을 잘 다듬어 멋을 낸 벽체가 있고, 그 위로 맑고 하얀 물줄기가 흐른다. 한여름이면 무척이나 시원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벽면분수다.

    분산은 김해를 상징하는 진산이다. 8부 능선에 오르면 고려 말 장군 박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옛 산성을 복원했다는 분산성이 웅장하고 매끄러운 자태를 뽐낸다. 왜구에 맞섰던 충의의 전장(戰場)이기도 하지만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에서 도래한 왕후 허황옥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분산의 정상 부근에 있는 천년고찰 해은사(海恩寺)에는 왕과 왕후의 표준영정이 모셔져 있고, 허왕후가 인도에서 도래할 당시 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도 재현돼 있다. 그런 인연을 스토리텔링하듯 산 중턱에는 내년 6월 준공을 목표로 가야테마파크 건립사업이 한창이다. 이 단지가 완료되는 내년 하반기에는 명실 공히 가야로부터 면면히 이어온 김해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산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성싶다.

    초입의 화려한 일주문을 뒤로하고 산으로 오르는 길은 완만한 트레킹 코스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나있는 도로에는 아스팔트 포장이 돼 있어 걷기도 좋고 차로 이동하기도 수월하다.

    산행길 사이사이에 보이는 억새가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붉고 노란 단풍은 이미 물기가 빠져 낙엽으로 변했다. 일부는 그가 있던 자리를 떠나 산허리를 양탄자처럼 장식했다. 일부는 고장 난 가을시계 시침처럼 희끄무레한 나뭇가지의 좌우를 오간다.

    도로 아래쪽으로 꽤 넓은 규모의 가야테마파크 공사현장이 있다. 123만3059㎡에 달하는 광활한 부지니 가야테마파크의 완성 후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는 가야시대 왕궁과 인도 아유타국의 전각이 수십 동이나 건립되고 있다. 대규모 연못도 눈길을 잡는다. 드라마 ‘수로’를 촬영했던 세트장이 남아 있어 마치 역사의 한 장면으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가야테마파크 건립 현장을 옆으로 끼고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비포장이다. 촉촉이 내리는 비를 맞아 바닥 흙에 찰싹 달라붙은 낙엽은 부드러운 벨벳 위를 걷는 듯한 부드러운 촉감을 준다. 살짝 비를 맞은 편백이 우연 속에 희고 푸른 잎을 내민 게 주변 정경과 꽤 조화를 이룬다.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장관이 펼쳐진다. 크고 작은 화강암을 보기 좋게 다듬어 차곡차곡 쌓아올린 분산성은 그야말로 그림이다. 분산성은 고려 말 장군?박위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옛 산성을 새로 쌓았고, 조선시대인 1871년 김해부사 정현석이 증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의 형태는 고대산성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퇴뫼식이다. 산의 8부 능선 정도를 빙 둘러싸며 성을 쌓는 것이 퇴뫼식이다. 현재 산 중심을 기준으로 서편은 복원사업이 완료됐고 동편에서는 축성작업이 한창이다.

    복원사업 당시 가야 신라의 토기파편이 다수 출토됐다는 안내기록으로 봐 산성의 축성 시기는 멀리 가야에서 신라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성곽에 오르니 김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때는 더 넓은 김해평야와 남해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던 곳이지만 이제는 평야 사이로 석주처럼 솟아오른 아파트단지가 경쟁적으로 영토를 넓히고 있다.

    거대한 돌 성이 병풍처럼 산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마치 잉카의 고대 유물을 보는 듯하다. 한때 김해의 땅이었지만 부산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돼 버린 가락과 대저, 명지, 녹산의 단편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해은사에 표준영정이 봉안돼 있는 수로왕과 왕후는 크게 쪼그라든 가락국의 영토를 보며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산성이 둘러싼 곳은 만장대(萬丈臺)로 불린다. 만장대는 조선말 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친 전진기지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라는 칭호를 내리고 직접 휘호까지 해서 김해로 내려 보냈다는 데서 비롯됐다. 1999년 복원된 봉수대 뒤편의 널찍한 바위에 대원군의 만장대 휘호와 낙관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김해사람들은 만장대를 랜드마크로 삼는다.

    성곽을 빙 돌아 좁은 바위틈을 지나면 키 작은 조릿대가 바람에 손짓하듯 산행객을 맞는다.

    조릿대 사이로 네 개의 석주가 눈에 들어온다. 석주 위로 우뜩 솟은 조형물, 바로 분산 정상에 있는 봉수대다. 조선시대의 것을 복원했다. 한때 이 봉수는 가덕도 연대봉수에서 피어오른 연기신호를 보고 불을 피워 인근의 진영 봉화산의 봉수대로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당시 밀양에 있던 일종의 세관인 ‘작원관’에서도 이 봉수신호를 보고 세관업무에 참고를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봉수대 유적에 올라 다시 내려다보는 전경은 또 다른 파노라마 작품이다. 사방팔방 탁 트인 우연(雨煙) 자욱한 도시의 실루엣은 두 발을 속세에 두고 있는 피조물임을 잠시 잊게 한다. 마치 구름 위에서 연극무대를 바라보는 듯한 황홀감이다.

    봉수대를 지나면 수로왕비인 허황옥과 그의 오빠인 장유화상이 무사히 바다를 건너게 해준 용왕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창건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해은사가 있다. 해은사 경내에 들어서기 전 고려 말 성곽축조를 했던 박위 장군의 업적을 기려 김해부사 정형석이 고종 8년(1871년)에 세운 ‘정국군 박공위 축성사적비(靖國君朴公 築城事蹟碑)’와 분산성 보수를 허가해준 대원군에게 감사하는 ‘흥선대원군 만세불망비(興宣大院君萬世不忘碑)’, 부사였던 정현석의 공을 기리는 ‘부사통정대부정현석영세불망비(府使通政大夫鄭顯奭永世不忘碑)’ 등을 한자리에 모은 충의각이 있다. 모두 왜적을 막기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리는 뜻을 담고 있으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경내에는 허왕후가 인도에서 도래하면서 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이 있다. 석탑의 규모가 실로 웅대하다. 고도를 말없이 굽이 살펴보는 듯한 모습이다. 경건함이 배어난다. 파사석탑이 수로왕 부처와 함께 2000년 고도 김해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현재의 김해에 대해 어떤 감상을 갖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글·사진= 허충호 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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