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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죽(墨竹)- 손택수

  • 기사입력 : 2014-12-0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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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墨竹을 친다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 외딴 시골 마을. 아무도 밟지 않은 숫눈이 설핏하게 쌓인 땅은 한 장의 습자지. 해도 돋지 않은 그런 시간에 호젓이 길을 나서는 할머니는 싸리를 엮어 소쿠리를 만들어 장삿길에 오른 가난한 내 할머니. 창문으로 할머니의 뒷모습을 좇는 마음에 아로새겨지는 발자국. 습자지 같은 눈길 위에 묵죽처럼 그리고 가는 긴 족적. 해가 떠오르면 나의 외로움은 더 확연한 것이 되고 그렇게 할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온갖 어린 상념들은 묵죽 위의 댓이파리처럼 돋아난다. 갖고 싶던 얼레나 어쩌면 운동화를 사 오실지도 모르는 일….

    할머니가 밟고 가신 길, 이제는 돌아오실 것이 분명한 묵죽 길 위에 큰 눈 오시지 말고 두렷한 그 길 되밟아 속히속히 돌아오시기를…. 나팔꽃 같은 귓바퀴가 눈 내리는 소리를 음표처럼 받는다. 조예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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