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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3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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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52) 서양화가 최행숙

거침없이 그었다, 캔버스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기사입력 : 2015-01-2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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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화가 최행숙 작가가 창원시 성산구 사파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긴 브러시를 이용해 작품을 그리고 있다.

    작업실에 버려진 물감을 모두 섞었다
    크고 작은 붓들도 한데 모아 묶었다
    녹인 물감을 쏟아붓고 선을 그렸다
    드러난 흑백의 흔적은 충격이었다

    선에 녹아든 생성과 사유·자유의지는
    본능과 감각에 충실히 몰입한 결과다
    정신을 깨치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나만의 형상이 비로소 완성된 것 같다


    작업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물감을 죄다 모았다.

    먼지가 뿌옇게 내려 앉았고, 이미 말라 있는 튜브도 있었다.

    한 통에 모두 짜내 한데 섞고 녹였다.

    붓도 모았다.

    비틀어지고 굳은 채 버석거렸다.

    붓을 끈으로 한데 묶어 뭉텅한 브러시로 만들었다.

    녹인 물감을 캔버스에 쏟아부은 뒤 브러시로 선(線)을 그렸다.

    ‘그렸다’기보다 ‘그었다’는 게 맞겠다.

    일순 하얀 캔버스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브러시가 할퀴고 간 흑(黑), 그리고 남겨진 백(白)에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그때서야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토하듯, 아주 깊고 길게.


    ◆거침없는 한 획…엄청난 결과

    꼭 6년 전의 얘기다. 작가는 개인 사정으로 5개월간 캔버스를 마주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작가로서는 무겁고 힘든 시기였다.

    외도(外道) 끝에 다시 돌아온 작업실. 몸에는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익숙한 곳이었지만 어째 한 번도 와보지 않은 듯 낯설었다. 잠깐 침묵과 낭패감이 흘렀다. 하지만 이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작가는 “무슨 거창한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버려두었던 물감을 마르기 전에 소모해야겠다는, 아주 단순한 발상이 현재 작업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일종의 물량 소모다. 명절이 끝난 뒤 남은 나물 따위를 큰 그릇에 몽땅 쏟아부어 비빔밥을 만드는 것과 다름 아니다.

    남아 있던 물감을 모두 짜내 휘휘 저었다. 어떤 색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섞은 것이다. 검정이 됐다.

    크기나 용도가 다른 붓들을 한데 엮어보니, 커다란 브러시로 변했다. 물감과 브러시를 든 채 하얀 캔버스를 마주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한 획(劃)을 그었다.

    작가는 “엄청난 결과가 가슴을 때렸다. 물감을 붓고, 붓을 던져 만든 형상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결과가 스스로가 원했거나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연발생적이다시피 도출된 형상에 흠칫 놀랐다”고 했다.


    ◆매번 전쟁 치르는 심정

    최행숙은 모노크롬(monochrome·한 가지 색만 사용해 그린 그림) 작가다. 더러는 일필회화(一筆繪畵), 또는 ‘행위예술가’라 일컫기도 한다.

    작가가 사용하는 색은 주로 검정(블랙)이다. 작가에게 검정은 ‘절대 색감’이다. 세상의 색을 모두 섞으면 결국 검정이 되는데다, 하얀 캔버스를 압도하면서 한편으로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색상으로 여기고 있다.

    ‘일필회화’나 ‘행위예술’의 해석은 겉으로 드러나는 작가의 작업 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작가는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다. 한 번 스치면 바로 굳는 특성이 있다. 때문에 빠르게, 또 넓은 캔버스를 채우기 위해서는 몸을 던지다시피 해야한다.

    작가는 “작품은 단숨에 완성된다, 하지만 이는 시간적인 개념으로만 측정한 것이다. 선(線)이 형상화되고, 에너지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인내와 사유(思惟)가 필요하다”며 “이런 시간은 내게 ‘유희’이자, 작업의 연장이기도 하다. 이후 붓을 던지는 것은 에너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테크닉이다”고 했다.

    작가는 선을 확장시키기 위해 붓을 던지기도 하고 붓과 함께 몸을 뒹굴기도 한다. 한 번의 붓 시도가 실패하면, 다시 물감을 지워내야 하는 중노동을 감수해야 한다.

    물감을 붓고 붓질이 끝나는 순간, 또 그 이후 아주 잠깐 허용되는 갈등까지. 외견상 모든 과정은 순간이지만, 작가에게는 진땀나는 긴 시간이다.

    작가는 “매번 전쟁을 치르는 심정이다. 그려지는 선의 형상에 생명력과 에너지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전신의 힘과 기(氣)를 한꺼번에 쏟아내야 한다. 이는 일반적인 퍼포먼스를 위한 움직임이 아니라, 내면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의식(儀式)이라는 게 맞을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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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행숙 작가가 자신의 컬러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검정 선…내면의 미(美) 의식 표현

    작가의 모노크롬 작업은 애초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우연찮은 계기로 나온 결과물에 스스로가 놀라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맘에 쏙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물감이, 붓도 무거운 게 거북스러웠다. 작품도 모양은 그런대로 나왔지만 메시지는 어딘가 허술했다.

    이는 이전에 해오던 작업들에 대한 미련 때문이기도 했다. 작가는 본래 실험적인 작품을 많이 해왔다. 동양적인것보다는 서구문화에 매료돼 실험적인 작품들을 많이 해왔다. 매듭, 본드, 흙 등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한 비구상 작품들이 주류를 이뤘다.

    작가는 “비구상이 훨씬 흥미가 있었다. 나의 의지를 개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 철학과 자유스러움, 또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 기존을 깨는 개척자적 정신 등을 담을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기존 작업에 대한 싫증도, 또 변신에 대한 갈망도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 작가를 모노크롬으로 한순간에 돌려세운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검정 단색이 전달하는 힘. 아울러 붓의 꺾기와 세기에 따라 나타나는 다양한 색깔과 형상에 빨려들었다. 검정으로 그려낸 선은 힘과 다양성, 회화가 추구하는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며 “브러시와 캔버스의 상호관계에서 형성되는 절묘한 조합과 조화는 나의 내면에 잠재돼 있던 미(美) 의식을 끄집어내기 충분했다”고 했다.



    ◆나만의 작품 세계 형성…다이내믹·심플

    모노크롬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다. ‘답습’이나 ‘모방’의 갈등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혹 내가 이전 모노파 작가들을 ‘답습’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심지어 ‘모방’으로 평가되는 비판도 감수해야 될 판이었다”며 “게다가 단색 작업은 너무 힘이 들었다. 가끔 무겁고 의아한 결과에 멀미를 느낄 정도였다”고 했다.

    새 작업에 대한 스스로와 주변의 평가, 여기에 일반적이지 못한 작업에 대한 회의감에 시달렸다는 얘기다.

    이 같은 질곡(桎梏)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고, 작가 특유의 도전의식이 발동됐다. 작가는 “세상에 더 이상 새로운 패턴은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내 것’을 찾는 것이다는 생각을 했다. 모노 작업에 대한 나만의 트렌드를 찾기 위해 고민과 실험을 거듭했다”고 했다.

    모노 작업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개인전을 가졌다. 작가를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놀람은 ‘이게 뭐지?’, ‘왜 바꿨지?’로 시작해 ‘신선하다’, ‘참신하다’로 마무리됐다.

    작가는 “가슴을 졸였는데 반응이 꽤 괜찮았다. 아마도 컬러작품만 접하다 모노크롬을 마주한 탓이겠죠. 선이 주는 생동감에다, 수묵화에서 느껴지는 심플한 여백(餘白)이 신선감을 준 것 같다”고 했다.

    작가는 2년 뒤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작품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으로, 이 전시를 통해 다시 한 번 자신만의 차별화된 트렌드를 확인하게 된다.



    ◆대작과 아리랑으로 해외시장 나설 것

    2013년 초여름. 작가는 뜻밖의 새로운 작품을 선보인다. 모노크롬이 아닌 화려한 컬러로 캔버스를 채웠다.

    작가는 “일종의 실험이자 즐거운 일탈(逸脫)이었다. 다소 묵직했던 모노톤에 시원함을 주기 위한 것으로, ‘소풍’이라해도 좋겠다”며 “하지만 이내 블랙으로 돌아왔다. 블랙은 나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또 작품의 토대인 대지(大地)와도 같은 것이다. 컬러는 조도(照度)에 따라 변하지만 검정은 조도가 낮을수록 살아난다. 세련되고 근사하다”고 했다.

    이후 블랙 모노크롬 작업을 지속한 작가는 지난해 가을부터 대작(大作)으로 또 한 번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150호 이상으로 300·400호까지 넘나들고 있다. 다소 느슨해지는 자신을 다그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작품성의 확장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작가는 “대작은 큰 붓에 걸맞은 여백이 있어 좋다. 때론 동적, 때론 정적의 여백이 편안하다. 붓이 전하는 에너지도 훨씬 크고 강하다. 선의 굴곡과 스침이 좀더 뚜렷하게 살아나는 것 같다”고 했다.

    작품이 확장된 것과 동시에 작가의식도 훨씬 두텁고 단단해진 모습이다.

    작가는 “선의 의미가 더해졌다. 생성과 사유, 자유의지가 모두 녹아들었다. 본능과 감각에 충실히 몰입한 결과다. 정신을 깨치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체계를 배제한 나만의 형상(形象)이 비로소 완성된 것 같다”고 했다.

    작가는 오는 4월 개인전을 연다. 전시장은 현재 작업 중인 대작으로 꾸며질 예정으로, 모노크롬과 컬러작품을 함께 선보인다.

    컬러작품의 부제는 ‘아리랑’이다. 문화유산과 관련된 음악 등은 많지만 회화분야는 찾아보기 어려운 데 착안했다. 아리랑의 선은 오방색 붓질과 잘 어울린다. 우리 아리랑을 이 ‘회화’로 발현시킨 것이다.

    작가는 “‘아리랑’은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작업이기도 하다. 모노크롬 대작과 함께 ‘아리랑’으로 해외미술시장에 진출할 계획이다”며 “표현의 깊이를 위해 보다 유연하고 원숙한 브러시 스트로크를 노력 중이다. 오직 하나의 바람은 이런 노력들이 감상자에게 감동과 기쁨을 선사했으면 한다”고 했다.

    글= 이문재 기자·사진= 전강용 기자


    ☞ 최행숙= 57년 경남 고성 출생. 경성대학교 졸업. 개인전 13회. 아트페어 단체전 초대전 다수. 동서미술상 수상(2013년), 메디치 우수작가상(2014년), 경남을 찾는 현장작가회 회원, 한국전업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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