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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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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시각장애인 위해 책 녹음하는 조은주 씨

“책 읽는 내 목소리가 누군가에게는 ‘눈’이 됩니다”
그저 소리내 책 읽는 게 좋아
책 읽으며 언니들 재우던 아이

  • 기사입력 : 2015-02-25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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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독봉사자 조은주씨가 지난 10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신월동 경남점자정보도서관 녹음실 부스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책을 녹음하고 있다./전강용 기자/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즐겁다.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도, 부모님의 심부름도, 생계를 책임질 직장까지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봉사활동도 그러하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이용해 봉사를 하면 그것은 어느새 즐거운 일상이 되는 동시에 누군가를 위한 따뜻한 마음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생업에 할애되는 시간만으로도 벅차다 보니 ‘시간이 없다’는 말로 봉사활동을 시도하지 못 한다. 직장생활이 ‘주’이고, 봉사활동과 여가생활은 ‘부’이기 때문이다.

    여기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봉사를 하며, 그것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10년째 경남점자정보도서관에서 시각장애인들의 독서를 위해 책을 녹음하는 낭독봉사자 조은주(43)씨다.

    지난 10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신월동에 위치한 경남점자정보도서관 녹음실 부스에서 만난 은주씨는 츠지 히토나리 소설 ‘사랑을 주세요’를 녹음 중이었다. 이 녹음 도서를 들을 시각장애인들을 생각하며 눈을 감고 들었다. 목소리는 거부감이 없이 잔잔했고 따뜻했다.

    녹음을 마친 은주씨에게 목소리에 대한 찬사부터 건넸다. 은주씨는 “소설 내용이 고아원에서 반항아로 자란 여주인공이 자살을 시도할 만큼 방황하는 중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되는 내용이다. 그래서 차분하고 따뜻하게 위로하듯 읽은 것뿐이다”며 부끄러워했다.

    일주일에 한 번, 2시간여를 책 녹음에 임하는 은주씨는 매주 누군가의 ‘눈’이 되고 있었다.



    ◆책 읽어 언니들을 재우던 아이

    은주씨의 낭독봉사는 처음부터 누군가를 위해 봉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는 게 참 좋았어요.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소리 내어 읽으면 왠지 그 책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은주씨의 가족 구성은 1남4녀. 보통 동생이나 딸 같은 아랫사람이 잠자리에 누워 있고, 윗사람이 책을 읽어 재우는 것을 상상하게 되지만 은주씨 집에서 그 일은 은주씨의 담당이었다.

    “언니들이 이불 속에 들어가서는 ‘은주야, 책 좀 읽어봐’라고 했어요. 그러면 저는 전날 언니들이 읽고 접어둔 곳부터 읽으며 언니들을 재웠지요. 저도 듣는 것보다 읽는 게 즐거워 흔쾌히 나섰고요.”

    책 읽는 습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한동안 까먹고 지냈던 은주씨의 ‘낭독’에 대한 열정은 결혼과 출산 이후 다시 떠올랐다.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데 문득 그때가 생각나면서 오랜만에 소리 내어 읽는 책이 반가웠어요. 아이에게 재밌게 읽어줘야겠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때부터였어요. 구연에 대한 갈증이 생긴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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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독봉사자 조은주씨가 지난 10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신월동 경남점자정보도서관 녹음실 부스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책을 녹음하고 있다./전강용 기자/

    ◆동화구연대회 입상하면서 봉사로

    오랜만에 해소하고픈 갈증이 생겨난 은주씨는 집 근처 문화센터를 다니며 동화구연을 배우게 된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한 1년여쯤 배웠어요. 그리고 ‘색동어머니회’라는 동화구연어머니회 주최의 동화구연대회에 나가서 운이 좋았던 건지 입상을 하게 됐어요.”

    은주씨에게는 입상과 함께 어머니회 회원자격이 주어졌다. 본격적인 구연과 낭독의 시작이었다.

    어머니회에서 5년여를 ‘구연 선생님’으로 활동하던 중 경남점자정보도서관으로부터 ‘녹음봉사’에 대한 제안이 들어왔다.

    “제안이 들어오고 바로 시작하진 못했어요. 어머니회도 제가 가고자 하던 방향과 달라 탈퇴를 했고, 그 이후 녹음봉사를 시작하게 됐죠.”

    은주씨는 이와 함께 시각장애인들에 영화 장면을 설명해주는 영화봉사도 함께 했는데, 그러던 중 녹음봉사에 대한 희열을 느끼게 됐다고 했다.

    “‘웰컴투 동막골’을 보며 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흩날리고 있다고 설명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 설명을 듣던 한 분이 ‘목소리가 낯익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디서 들었을까 생각하다 책 녹음봉사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죠.”

    은주씨의 목소리를 낯익어 한 사람은 이내 “양귀자의 소설을 녹음했나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요.”라고 물었고, 은주씨는 온 몸에 전율이 돋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뜻깊더라고요. 누군가 내 목소리로 녹음된 소설을 잘 읽었다며 감사하다고 하니 제가 딱히 한 일도 없는데 이분들께는 도움이 되는구나 싶어 전율이 돋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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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독봉사자 조은주씨가 녹음한 내용을 확인하고 있다.


    ◆관심→사랑→안구 기증으로 이어져

    “누가 그러던데 목소리가 신체에서 가장 늦게 늙는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생각할 때 들어줄 만하다 싶을 때까지는 계속할 생각이에요.”

    은주씨는 녹음봉사를 하며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생겨났다고 했다. 40세 되던 해에 안구 기증을 결심했다.

    “사람이 나이에 ‘9’자가 붙으면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 되고, 결심을 하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하다가 결심했죠.”

    최근 은주씨는 영어유치원의 차량 탑승 교사 일을 돕고 있다. 보수는 적지만 봉사활동하기엔 안성맞춤이다.

    “다른 일들은 거의 아침에 시작해 저녁까지 끊이지 않고 하는 경우가 보통이라 일을 시작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 일을 하면 돈은 벌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가 없더라구요.”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게 된 것은 돈을 벌어오라고 하지 않는 좋은 배우자를 만난 덕분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10년째 쉬지 않고 달려온 녹음봉사 일이지만 은주씨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책은 끊임없이 나오기 때문.

    “낭독담당 선생님이 한 번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찐한(?) 로맨스물도 녹음이 가능하냐’고 물었어요. 뭐 어떻냐며 신나게 녹음했죠. 그들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죠. 앞으로도 더 많은 장르와 좋은 책을 녹음하도록 목소리를 갈고 닦아야겠어요.”

    김현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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