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5일 (목)
전체메뉴

[작가칼럼] 새내기를 위한 붓방아- 한판암(수필가)

  • 기사입력 : 2015-02-27 07:00:00
  •   
  • 메인이미지


    모레면 춘삼월이다. 이 봄에 새로운 출발을 위한 설렘과 두려움으로 밤을 지새울 다양한 새내기들에게 말 부주를 해 볼 요량으로 붓을 들었다가 옴짝달싹 못하고 붓방아를 찧으며 밥만 축내던 ‘밥쇠’의 독백이다.

    그림을 업으로 하는 동네의 얘기이다. 처음 입문하면 무조건 남의 그림을 그대로 베껴 그리는 임모(臨模)단계에 머문다고 한다. 그 경지를 끝없이 반복하다가 남의 그림에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가감하는 방작(倣作) 단계로 진일보한다는 얘기이다. 이 수준에 이르면 남의 색채가 옅어지고 자기 특징과 때깔이 점점 뚜렷해진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이 지나면 완벽하게 자기 주관이나 철학을 바탕으로 고유한 화풍(畵風)을 이룩해 하나의 화가로 탄생한다는 천명에 공감한다.

    검술과 그림은 차원이 다를 법한데 맥을 같이한다. 검술하는 이들이 들려준다. 검술에서 단련(鍛鍊)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단(鍛)’은 같은 동작을 1000번, ‘련(鍊)’은 1만번 반복 연습을 뜻한다는 얘기이다. 단순한 검술동작 하나를 익히는 데도 피나는 노력이 따라야 함을 웅변한다. 이러한 이치는 어찌 그림이나 검술에만 국한되리오. 세상만사 투철한 도전정신이나 자기희생 없이 얻을 수 있는 게 존재할 손가. 그렇지만 새내기들에게 천금 같은 삶의 지혜나 지식도 슬기로운 전수방법과 때가 있는 법이다.

    병아리가 부화를 시작하면 일정한 시간 내에 달걀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와야 새 생명을 얻는다. 이에 부합한 행위가 ‘줄탁동시(啄同時)’이다. 부화란(孵化卵)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려고 연약한 부리로 죽을힘을 다해 쪼아대는 행위가 ‘줄(: 쪼을 줄)’이다. 이때 어미 닭은 병아리가 쪼아대는 소리를 알아채고 바깥에서 부리로 껍질을 쪼며 돕는 행위를 ‘탁(啄: 쪼을 탁)’이라고 한다.

    이 숭엄한 찰나에 아귀가 맞아야 할 철칙은 ‘줄’과 ‘탁’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병아리와 어미닭이 함께 껍질을 쪼지만 어미는 도우미에 머물 뿐이다. 결국 어미는 병아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알을 깨고 광명천지로 나오는 탄생의 환희는 병아리 자신의 의지와 도전이 낳은 결실에 따른 보상이며 축복인 셈이다.

    모든 세상사가 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새내기들이 새겨 두었으면 좋으련만.

    어떤 삶을 겨냥해야 할까. 인술을 펼치는 의사에게서 답을 찾는다. ‘의학 지식을 가까스로 터득’한 소의(小醫)는 ‘기껏해야 병을 고치’는 치병(治病)의 수준을 넘을 수 없고, ‘식견을 어느 정도 구비’한 중의(中醫)는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치인(治人)이 한계 능력이다. 그들에 비해서 ‘하늘의 천리나 자연의 섭리를 달통’한 대의(大醫)에 이르면 ‘나라를 고칠 수 있다’는 치국(治國)이 가능하기에 세상도 너끈하게 바꾼다는 인식이다. 우리네 삶이나 하는 일도 다를 바 없을진대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화두에 대한 되새김이 필요한 걸까.

    가을에 파종할 보리나 밀을 봄에 파종하면 결실하지 못한다. 그들은 가을에 파종해 겨우내 혹독한 추위를 온몸으로 견뎌내며 생물학적으로 형질이 변형되는 버널리제이션(vernalization) 과정을 거쳐야 결실에 이른다.

    우리의 삶도 같은 맥락이라는 견지에서 ‘맥(脈)도 모르는 터수에 침통(鍼筒) 흔드는’ 짓을 하면서 외람되게 새내기들에게 응원가를 부르고 싶었다. ‘훨훨 날아라! 하늘 높이’라고.

    한판암 수필가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