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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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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탐독(日常耽讀) (2) 기형도/ 기형도 전집

  • 기사입력 : 2015-03-12 09: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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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배.
    이 자리를 빌어 고백 하나 해도 될까요.
    저 사실 선배를 미워한 적이 많았습니다.
    죽어라 노력했는데도 당신 발치에도 못 미치는 저를 발견할 때마다 당신이 미웠습니다.
    비극이지만 말입니다,
    전 어쩌면 선배 앞에서만은 영원한 패배자일지도 모른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소설가 이제하 선생의 단편소설에 이런 장면이 나와요.
    화가인 여주인공이 어느 전시회를 갑니다.
    그림 앞에서 여주인공은 엉엉 목놓아 울어버려요.
    옆에 있던 사람이 주인공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그녀 왈, "이 망할 놈의 자식이 내가 그릴 그림을 이미 다 그려서 억울해서 운다"고 합니다.

    바로 그거예요.
    제가 선배에게 느끼는 근거 없는 질투심과 시기심, 선망과 동경 그리고 두려움까지.
    저야말로 선배의 시 앞에 욕을 끌어다 붓고 사지를 버둥대며 울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 망할 놈의 자식이 내가 쓸 시를 이미 다 써버렸다"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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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문학과지성사/'기형도 전집'/6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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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유고시집을 저는 대학시절 도서관에서 처음 읽었습니다.
    어땠냐고요?
    충격적이었죠.
    기형도는 천재다. 기형도는 천재시인이다…. 그렇게 되뇌이며 도서관을 터덜터덜 나와야 했습니다.
    선배의 시가 가진 극적 요소들, 분명한 이미지들, 그것들이 충돌해 만드는 공감각적 심상들.
    저를 비롯한 많은 현대인들이 당신의 시가 가진 세련된 감각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민중시, 노동시가 추앙받던 시절 선배의 시는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시대착오적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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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대학 시절' - 문학과지성사/'기형도 전집'/4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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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동안 세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당신이 이승을 버린 뒤 당신의 시는 한국문단의 새로운 경향으로, 하나의 부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신의 시를 신봉하면서도 맹렬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저 같은 미물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니 기형도 선배.
    제가 당신께 드리는 이 농도 짙은 미움은 사랑과 존경의 또 다른 이름일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하고 싶었던 진짜 고백입니다.
    한마디로 저는, 사랑을 잃고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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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 문학과지성사/'기형도 전집'/8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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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7일은 故 기형도(1960~1989) 시인의 26주기였다.
    언론사 선배로서, 앞서간 문인으로서 건방지게 '선배'라고 불러 봤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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