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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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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실아" "주열아" 3·15 그때 그 친구들

“용실아” 체격 좋고 의젓한 반장 영원한 나의 ‘영적 리더’
“주열아” 주검으로 처음 만난 친구 ‘살아있다면’ 생각에 먹먹
[3·15기획] 3·15의거 현장에서 친구 이름을 외치다

  • 기사입력 : 2015-03-12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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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형씨가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의거 기념탑 앞에서 당시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 김용실 열사의 친구 - 마산고 21회 김준형씨

    미성 섞인 목소리와 장난기 어린 얼굴의 용실
    시위대 이끌다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희를 넘긴 김준형씨와 정순구씨는 55년 전 같은 날 각각 친구를 잃었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부통령 선거가 있던 날이었다. 다음 날 친구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날은 ‘3·15의거’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됐고 함께 뛰놀던 친구는 ‘열사’가 됐다. 2015년 3월, 김씨와 정씨는 70대 노인이 됐다. 하지만 사진 속 두 친구는 자라지도, 늙지도 않았다. 두 노인의 가슴속에 영원한 청소년으로 살아 있는 김용실 열사와 김주열 열사,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준형(71)씨가 기억하는 친구 김용실은 ‘체격이 좋고 건실하고, 의젓한 반장’이다. 미성이 섞인 변성기 목소리와 장난기 어려 있던 친구의 훤한 얼굴은 지금도 생생하다. 뒤에서 일을 모의하는 참모가 아닌 앞에 나서 깃발을 흔드는 주동자 스타일의 친구. 17살 천진난만한 병아리들이 모인 고교 1학년 사이에서 용실은 제법 어른티가 나기 시작한 중병아리 같았다고 김씨는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용실은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를 타도하는 학생 시위대를 이끌다 지금의 3·15의거탑 부근에서 머리에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떴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용실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죠.”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게 당연한 이치인 줄 알았는데, 용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작은 파문으로 시작돼 집채만 한 파고가 되어 김씨의 삶에 시시때때로 부닥쳐오곤 했다. 그 근저에는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하는 김씨만의 아픔이 있었다.

    “부친이 허윤수 의원 측근이셨습니다. 선거대책본부장을 지내며 허 의원과 정치적 동지로 활동하셨어요. 그러니 우리 집도 시위대의 주공격 대상이었죠.”

    3월 15일 마산 정국에 가장 큰 혼란을 초래한 장본인은 허윤수였다. 1958년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한 허윤수 의원은 시민들에게 비교적 신망을 얻어온 보수적인 정치인이었지만,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시민들의 규탄 대상으로 전락했다. 허 의원의 집과 김씨의 집은 3월 15일 밤 시위대에 의해 풍비박산 났다.

    “당시 정황상 저는 불의에 소속된 사람이었고 용실이는 불의를 타도하려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었죠. 몰려드는 시위대를 피해 우리 가족이 친척집으로 피신하지 않았다면 용실이와 저는 같은 반 친구가 아닌 다른 차원의 관계로 서로를 마주했을지도 모릅니다.”

    공격자와 공격을 당하는 자. 살아남은 자와 세상을 떠난 자. 이 양립할 수 없는 상흔은 지난 55년 동안 김씨의 마음 깊은 곳에 각인됐다. “3·15와 용실이의 죽음, 그날 이후 부친과 우리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초가 저를 문학의 길로 이끌었다고 봅니다.” 그는 마산고등학교 졸업 후 연세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뒤 저술가로 활동하며 감성적 에세이 여러 권을 출판했다. 2011년부터 3년 동안 마산고 21회 동기들의 힘을 모아 김용실 열사를 기리는 ‘추모의 밤’ 공연을 열기도 했다. “문학적, 예술적으로 용실이를 기리는 것만이 용실이의 귀한 죽음을 때 묻지 않게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씨는 김용실 열사를 자신의 ‘영적 리더’라고 했다. “불의와 타협하기 쉬운 국면에 놓이면 어김없이 ‘용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실이는 제게 끊임없이 삶을 바로 살도록 감시하고 격려하는 존재였어요. 아마 영원히 그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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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구씨가 창원시 마산합포구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에서 당시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 김주열 열사의 친구 - 마산상고 37회 정순구씨

    추억 만들 새도 없이 주검으로 떠오른 친구
    남원으로 문상갔던 기억은 생생하게 남았습니다

    정순구(73)씨는 1960년 김주열 열사와 고등학교에 함께 입학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정씨는 마산동중에서, 김 열사는 전북 남원시 금지면 금지중에서 마산상고로 진학했고, 학기 시작을 기다리던 1960년 3월 15일 저녁 김주열 열사는 시위대에 휩쓸려 실종된다.

    “주열이랑 추억 만들 것도 없었어요. 주열이 얼굴 익힌 것도 주검으로 떠오른 모습을 본 게 처음이었으니,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거지요.”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열사의 주검이 발견된 4월 12일은 정씨에게 어제처럼 생생하다. “얼굴에 못이 박힌 시신이 떠올랐다는 소문이 마산 전체에 삽시간에 퍼졌어요. 그날 오후 2시쯤 근처를 지나다 주열이를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고기잡이배에 의해 건져 올린 김 열사의 주검이 누워 있던 장소는 지금의 합포구청과 창원지검 마산지청 사이에 있던 작은 연못 부근이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더니 짚으로 된 거적이 깔려 있었어요. 거적을 들췄더니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주열이가 보였죠.” 다음 날 전국 신문에 김주열 열사의 처참한 모습이 실렸고, 정국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곧이어 4·19가 터졌다.

    이는 분명 한국 현대사에 획을 그은 대대적 사건이었지만, 정작 어린 정씨에게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김주열 열사의 본가로 문상을 간 일이다. “1960년 5월 5일이었어요. 작고하신 3학년 김양부 선배, 2학년 김종배 선배, 그리고 1학년 저, 이렇게 3명이 마산상고를 대표해 진주행 버스를 탄 뒤 진주에서 남원행 버스로 갈아타고 금지면 금지리로 갔습니다.”

    그들의 갑작스런 방문을 맞아준 건 김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였다. “반 울음 상태이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주열이 묘에 갔어요. 집에서 10분 남짓 거리에 있는 동산에 묻혔더라고요. 묘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봉분 위에 흰 마사토가 흩뿌려져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권 여사는 돼지고기 묵은지 찌개로 정씨 일행을 대접했다. “시골에서 대접할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었을 겁니다. 돌이켜 보건대 도회지로 유학 갔다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 문상 온 친구들을 보는 어머니 마음이 어땠을까 싶습니다.”

    정씨는 마산상고 졸업 후 서울대학교 상대를 거쳐 기업은행 등 금융권에 오랫동안 재직한 뒤 마산에서 회계사로 일하고 있다.

    “주열이가 살아 있었다면 저처럼 은행 다니면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어머니께 효도하며 평범하게 살았을 겁니다. 주열이의 죽음은 분명 숭고한 것이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 안쪽이 찡합니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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