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4일 (수)
전체메뉴

[열린포럼] 어느 날 문득, 꽃은 핀다- 김지율(시인)

  • 기사입력 : 2015-03-17 07:00:00
  •   
  • 메인이미지

    내가 사는 동네에는 둘레가 5㎞가 넘는 아주 큰 못이 있다. 봄이 되면 못 주위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도는 것이 내가 이 동네에 정착하면서 얻은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다. 벚꽃이 피는 이 계절에 그 못을 지나 구불구불한 옛길을 따라 청곡사로 가는 이 길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길 중의 하나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봄날, 할아버지의 꽃상여를 따라가던 먼 길이고 대학 다니던 어느 날, 아버지를 그 절에 모셔놓고 돌아오던 길이다.

    나는 그 길가에 말없이 핀 벚꽃을 사랑했다. ‘사꾸라꽃 피면 여자 생각난다. 사꾸라꽃 피면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는 김훈의 글이 아니더라도 나는 충분히 그 하얀 벚꽃 잎이 날리는 날들을 사랑했다.

    모든 풍경은 저마다의 상처를 갖고 있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그 풍경 속에 내재되어 있는 가장 내밀한 신음과 고통들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운 시절들이 있었다. 말할 수 없는, 말하지 못한 상처들은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들과 벼락같이 충돌해 깨지는 것이라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구원이나 믿음은 애초에 없는 것이므로 그것들을 견디며 무뎌지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통과할 수 없는 문을 혼자서 통과해야만 했던 시절 이 길은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위안을 준 나의 지극히 개별적인 그래서 남다른 길이다.

    최근 그 길에 큰 벚나무를 베어내고 새로 길을 만들고 있다. 가로수 벚나무들을 얼추 다 베어내고 구불구불했던 길이 어느 순간 일직선으로 변해 있다. 아파트가 더 들어서고 자동차가 더 많이 다니고 혁신도시로 이어지는 새 길을 만들고 있다. 벚꽃 터널이 되었던 큰 나무들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아 한동안 멍한 기분이고 기억의 한 부분이 몽땅 잘려나간 느낌이다.

    그럼에도 이 봄, 나는 겨울 동안 먼지 앉은 자전거를 꺼내 그 길로 나선다. 내가 보는 이 길이 당신들에게도 그 길로 존재할지, 나는 기억하지만 당신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 당신들은 알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 누군가는 믿지만 나는 믿지 않는 거대한 시스템으로부터 혁신적인 계획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지고 싶은 봄날이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게는 풍경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는 봄이다. 누군가에게는 자본과 권력이, 누군가에게는 죽어서도 아물지 않는 흉터가 되는 봄이다. 아직 남아 있는 가로수 길이 있다. 지울 수 없는 풍경들이 남아 있다. 그 길은 더디더라도 천천히 가야 한다. 잡을 수 없는 순간, 잡히지 않는 순간들을 이 봄은 뭐라 말할까.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 연민하지 말고 쓸모없는 것은 쓸모없는 대로, 실패하는 것은 실패한 대로 그냥 두면 된다. 소통되지 않는 것에 대해, 울고 있는 것에 대해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냥 밀고 나가는 것뿐이다. 들추기 싫은 그늘과 말하기 싫은 침묵을 그냥 묵묵히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무와 나무 사이, 한 행과 한 행 사이, 말과 말 사이 그늘이 무서울 정도로 미덥다. 세상은 그 그늘과 슬픔의 힘으로 더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자 그러니 오늘 저는 ‘벚꽃엔딩’을 들으며 자전거를 끌고 이 봄 길을 조용히 나섭니다.

    김지율 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