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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전설의 한일합섬 터- 한판암(수필가)

  • 기사입력 : 2015-03-2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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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의 양덕동 메트로시티 공원에 ‘한일합섬옛터’라고 새겨진 기념석이 있다. 이 터는 우리의 산업화와 궤(軌)를 같이하며 상상하기 어려운 상전벽해의 변화가 거듭됐던 반백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진 현장이다. 지난 64년 마산시의 변두리 농경지와 띄엄띄엄 산재했던 주택을 철거한 9만여 평에 공룡 같은 매머드 공장을 지어 입주했던 한일합섬이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았던 지독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비장한 변신의 시도였다. 그렇게 국가적으로 절절한 염원을 담아 추진되던 산업화의 중심권에 들어서며 건설된 공장은 연중무휴로 쌩쌩 돌아가며 매일 제품을 산더미처럼 생산하면서 우리의 굴뚝산업을 선도했다. 그리고 일취월장의 발전을 거듭하면서 경외의 대상으로 등장해 위용을 자랑했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섬유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버텨내지 못하고 2004년 공장을 매각함으로써 문을 닫았다.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요람이라는 자존심도 지켜내지 못하고 흉측한 괴물덩이로 전락했다가 마침내 2006년 마지막 남은 굴뚝까지 해체됐다.

    공장 터는 마산 제일의 집단주거지로 환골탈태해 초고층 아파트가 연이어 들어서며 경관을 바꿔 놓았다. 외지인들은 그 자리가 반세기 전에 논밭과 변두리 동네였는데 엄청난 공장이 들어서 산업화를 이끌다가 또다시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엔 까마득하리라.

    한일합섬 하면 떠오르는 직업군이 여공들이다. 내남없이 궁핍했던 시절 우리의 누이들 수천 명이 밤낮 맞교대하며 피땀을 흘려 일했던 서러운 역사의 현장이다. 그녀들은 10, 20대의 소녀이자 청춘들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여공이었으나 공장 안에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를 개교해 주야간반으로 입학시켜 교육을 받도록 배려했다.

    지금은 개명된 한일전산여자고등학교가 공장 터의 한쪽 모서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 학교 운동장엔 암울했던 시절 섧게 꿈을 가꿔 나가던 소녀들의 마음이 아직껏 푸르고 굳세게 뿌리 내려 있다. 당시 재학생들이 추석에 고향에서 잔디 한 장씩 들고 와 운동장에 심었다는 ‘팔도잔디’가 그것이다. 이에 연상되는 특이했던 풍경 하나가 떠오른다. 설이나 추석이면 여공들의 귀향을 위해 회사에서 수십 대의 버스를 마련해 전국 여러 요지로 가던 진풍경 말이다.

    전통적인 농어업에서 산업사회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선도산업이 필요하다. 원래 초기에 산업화를 이끄는 부문이 섬유산업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일합섬은 산업 발전을 위한 터전을 다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졌다.

    도시의 변두리 논밭과 영세민 거주지에서 압축성장의 표상 같은 공장의 자태를 한껏 뽐내던 명운도 고작 40년 정도였을까? 공장이 뜯겨 흔적 없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매미의 선탈(蟬脫)같이 화려하게 초고층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을 거듭한 변화무쌍했던 터이다. 불과 반백년 남짓한 세월 동안 이처럼 엄청난 변혁의 소용돌이를 겪었던 닮은꼴이 또 있을까? 앞으로 몇 세기 지나도 이런 격변의 경험은 어려우리라.

    공장의 혈맥인 생산라인의 지킴이로서 피땀 흘려 일했던 여공들은 분명 ‘이름 없는 영웅’이었다. 이제는 가장 젊은 축이 불혹의 중반일 터이고 위로는 고희의 고개 언저리에서 세월을 헤아리고 있을 게다. 그렇게 인고의 세월에 온몸을 던져 희생했었는데, 죄다 따스하고 반듯한 둥지에서 평화롭고 살뜰하게 살고 있는지 투영해 볼 요술거울은 없을까?

    한판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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