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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3) 타인의 취향 - 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은 그것

  • 기사입력 : 2015-04-02 09: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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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라가 콧수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다음날 면도를 하고 온 카스텔라. 정작 클라라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탄산음료를 마실 때는 꼭 사이다를 고른다. 쿠폰으로 바꿔 먹은 치킨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치킨을 좋아하고, 회를 포함한 날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커피는 주로 아메리카노. 붉은색보다는 푸른색을, 자미로콰이나 다프트펑크의 음악을 좋아한다.

    언제부터 사이다를 좋아하게 됐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유도 그렇다. 그냥 사이다의 포장이 초록색이라는 것과 사이다의 색깔이 콜라와는 다르게 투명한 색이라 왠지 몸에 덜 해로워 보인다는 점 정도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치킨은 맛 있어서, 같은 이유로 회는 특별한 맛을 느끼지 못해서 좋아하지 않는다.

    아메리카노는 대학교 3학년 때쯤 처음 마셨다. 그전까지는 크림을 한가득 올리고 초코시럽을 뿌린 카페모카만 마셨는데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된 후에는 스스로가 좀 더 어른이 된 것 같았고 세련되게 느껴졌다. '이런 씁쓸한 맛이 커피의 참맛인가'라고 허세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마시던 게 습관처럼 굳어졌다.

     
    생각해보니 취향이라는 것이 대게 그런 것 같다. 내 취향이 나름 세련됐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살지만 언제 어떻게 형성됐는지 정확히 기억나는 경우도 많지 않고, 좋아하게 된 계기도 싱겁거나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취향은 어느 순간 자신에게 절대적인 어떤 기준처럼 돼버리고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 짓는 잣대가 된다. 이를테면 카페모카가 제일 좋다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아직 커피 맛을 잘 모르네.'

    취향은 콜라·사이다를 고르는 문제처럼 사소하고, 어느 날 카페모카에서 아메리카노로 바뀌는 것처럼 변덕스럽다. 하지만 그 사소한 취향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특히 연인, 혹은 부부관계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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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스텔라가 클라라의 일행에게 코미디가 좋다며 이야기 하지만 누구도 집중하지 않는다. 클라라 일행은 그의 취향이 저급하다고 생각하며 무시한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 사는 중년 남성 카스텔라의 사례를 보자. 그는 중소기업의 사장이며 예술에는 전혀 관심도 지식도 없다. 어느 날 조카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억지로 보게 된 연극에서 배우인 클라라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반면 클라라는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가 예술에 문외한이라는 점 때문에 자신의 취향에 우월함을 느낀다. 그리고 카스텔라가 자신보다 저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실상 그녀는 40대고 고정된 수입이 없어 집세 걱정을 하는 신세임에도 말이다.

    클라라가 그렇게 생각해도 카스텔라는 적극적이다. 그는 클라라를 선생으로 초빙해 영어공부를 하고 그녀가 등장하는 연극의 대본도 읽어 보려고 애쓴다.(물론 그녀가 나오는 장면 4쪽을 읽는 데 그친다) 그녀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의 모임에도 참석한다. 클라라의 친구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무시하고 냉소를 던지지만 그는 계속 얼굴을 내민다. 심지어 그녀가 콧수염이 싫다고 하자 다음날 수업 시간에는 콧수염을 밀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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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젤리크가 자신의 취향대로 꾸며 놓은 집.

    반면 인테리어 일을 하는 카스텔라의 아내 앙젤리크는 자신의 취향으로 타인을 억압하는 사람이다. 집은 온통 그녀의 취향으로 도배돼 있다. 침대, 소파, 식탁보, 장식용 그림 등 집안 모든 곳에는 꽃무늬가 가득하다. 그녀는 카스텔라가 처음으로 집에 걸어놓은 그림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떼버린다. 카스텔라는 마침내 폭발한다. "이 집에서 내가 고른 것은 하나도 없어! 하나쯤은 그대로 두면 안 돼?" 카스텔라는 집을 나가버리고 그녀는 꽃무늬로 도배된 집에 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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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스텔라가 그의 집에 처음으로 장식한 자신의 취향. 꽃무늬와 꽃그림 속에서 홀로 외로워 보인다.


    A와 만날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닭갈비 가게에서도, 파스타 가게에서도, 영화관에서도 항상 사이다를 시켰다. 일주일에 몇 번씩 치킨 가게를 가자고 말했고 차에서는 항상 자미로콰이나 다프트펑크, 혹은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노래를 틀었다. 어느 순간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앙젤리크가 카스텔라가 처음으로 걸어둔 그림을 떼버리는 것을 보면서 문득 내가 A와 회를 먹으러 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A는 회를 무척 좋아했다. A와는 꽤 오래 만났고 수많은 음식을 먹었지만 횟집에 간 적은 없었다. A는 어느 날 통영에 정말 맛있는 횟집이 있다며 가보자고 했다. A가 회를 먹자는 얘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거절했다. "회는 내 취향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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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초대한 연극에 카스텔라가 참석한 것을 알고 기뻐하는 클라라.


    카스텔라는 자신과 전혀 다른 취향을 가진 클라라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클라라는 카스텔라의 노력에 그에 대한 마음이 벽을 허문다.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려고 노력조차 않는 앙젤리크는 쓸쓸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A와 만났던 시간동안 나는 카스텔라였을까, 앙젤리크였을까. 아마도 후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나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A에게 사이다나 치킨을 넘어 옷차림, 머리스타일, 영화나 책에 이르기까지 내 취향을 강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씩은 사이다가 아닌 다른 종류의 탄산음료를 시키고, 치킨이 아닌 회를 먹을 수 있는 관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언젠가 회의 참맛을 알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카스텔라가 클라라를 이해하면서 그림에 눈을 뜬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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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영화소개>
    1999년 개봉된 프랑스 아녜스 자우이 감독의 영화. 그녀는 이 영화에서 감독·각본·출연 세 가지 역할을 소화했다. 카스텔라와 클라라, 앙젤리크뿐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카스텔라의 사설 경호원인 프랑크와 클라라 일행이 자주 찾는 술집의 바텐더인 마니(감독이 연기) 커플, 앙젤리크의 운전기사인 브루노 등이 타인의 취향에 어떻게 반응하는 지를 보여준다. 각 인물의 테마에 맞게 흘러나오는 음악이 영화의 감칠맛을 더해준다.(참고로 이 영화는 완벽히 내 취향이다.)

    김세정 ( 편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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