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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비경 100선] (97) 노란 수선화 물결치는 거제 공곶이

새파란 바다 곁 샛노란 별들의 바다

  • 기사입력 : 2015-04-09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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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 공곶이에 흐드러지게 핀 노란 수선화가 동백나무, 종려나무와 함께 건너편 내도의 봄과 속삭이고 있는 듯하다.


    그녀가 창문을 열었을 때 교정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수선화’라고 외치는 그녀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노란 수선화 속 그 남자는 대답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꽃이죠.”

    원래 꽃밭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만큼 교정을 가득 메운 광경에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나 많은 수선화를 준비했냐고 묻자 그 남자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말한다.

    “다섯개 주의 아는 사람에게 모두 전화했어요. 내가 결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얘기했죠.”

    10년쯤 전에 봤던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빅 피쉬’의 한 장면이다. 남자 주인공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노란 수선화를 시야가 닿는 지평선 너머까지 가득 심은 뒤 그녀에게 청혼한다. ‘나를 잘 모르지 않냐’는 그녀의 질문에 ‘그건 인생의 나머지 시간에 알아가면 되요’라고 대답하는 남자. 그녀는 결국 그의 진심을 느껴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수선화’라는 꽃을 처음 본 계기였고, 영화 속 장면이 강렬했기 때문일까. ‘빅 피쉬’ 이후 나에게 수선화는 그런 의미이자 가장 좋아하는 꽃 중 하나가 됐다.

    살면서 꼭 한 번은 받고 싶은 프러포즈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수선화로 가득한 광경을 현실에서 볼 수나 있을까 싶은 환상이었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봄을 만끽하기 위해 나는 그와 함께 꽃 구경을 계획했다. 연분홍 벚꽃은 도심 속 가로수로 줄지어 서있었고, 상아색 목련도 종종 눈에 보였지만 이곳에서 보는 꽃들에는 영 감흥이 없었다.

    설렘을 잔뜩 안고 계획을 하던 것도 잠시, 바쁜 일상에 우리는 ‘다음 주’를 외치며 연일 계획을 미루기 일쑤였고 이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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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란 수선화가 핀 공곶이.

    지난 주말 집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온 그는 차에 타자마자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손에 쥐여줬다.

    ‘오늘 뭐하지?’라는 질문에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차를 몰았다. 차는 미궁에 빠진 행선지를 한참 동안 달렸다.

    한 시간여가 지났을까. 차는 거가대교를 지나 거제에 들어서고도 한참을 달렸다. 옆으로 보이는 와현해수욕장을 지나 예구마을 끄트머리에 다다라서야 차는 멈췄다.

    그는 이곳을 ‘공곶이’라 했다. 네가 좋아하는 꽃이 가득하다는 짤막한 답변으로 길을 걸었다.

    20분여를 가파른 시멘트 언덕을 따라 오르며 숨을 헐떡거렸다. 얼마나 아름다운 꽃이길래 이런 수고를 겪어야 하나 싶었지만 이내 나무로 뒤덮은 나무터널이 나왔다. 수줍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피어난 동백이었다.

    100m도 되지 않는 것 같은 짧은 평지의 터널을 지나면 오른쪽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할 돌계단이 나타났다.

    꽃잎이 하나둘 떨어지는 다른 꽃들과는 달리 송이째 떨어진 동백이 레드카펫인 양 우리를 맞이하는데 너무 가파른 경사에 나는 한 손은 그의 어깨에 의지한 채 또 한 손은 옆의 안전끈을 잡은 채 한 발씩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동백나무로 이뤄진 터널이 그늘이 아니라 어둠이라고 느껴질 때쯤 터널은 끝이 났다. 그는 평지에 들어서자 마자 내 눈을 가렸고, 10여m를 가서는 멈춰섰다.

    ‘하나, 둘, 셋’ 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걷히자 눈앞에 나타난 건 노란 바다였다. 10년 전 그 영화에서 봤던 그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광경이었다.

    그는 영화 속 그 남자처럼 “네가 좋아하는 꽃이 한가득 있다고 해서…”라며 쑥쓰러운 듯 말끝을 흐렸다.

    그의 뒤를 가득 메운 수선화는 쨍한 노란색을 뽐내며 봄을 알리는 듯했다. 하늘에 빛나는 별이 가득 떨어진 것도 같았다.

    수선화 꽃밭을 마주한 채 커다란 몽돌 더미 아래로는 파란 바다가 햇살에 반짝였고, 팔뚝만한 숭어는 간간이 바다 위로 뛰어오르며 봄의 생동감을 전했다.

    노란 바다와 파란 바다를 담기 위해 사진기와 고군분투하는 우리에게 한 행인은 “이쪽에서 찍는 게 훨씬 예뻐요”라며 손을 흔들었다.

    행인의 손짓에 한 발짝 내려가 본 수선화는 더욱 아름다웠다. 자존심, 고결이라는 꽃말과는 달리 그들은 하나같이 바다 쪽을 바라봤다. 마치 해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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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곶이 앞 몽돌해변을 걷고 있는 관광객들.

    수선화 꽃밭을 가득 만끽하고 돌아서는 길, 그는 신문지로 대충 감싼 수선화 다발을 건넸다.

    꺾었냐는 질문에 그는 당황한 듯 손을 내저으며 “저기서 샀다”고 동백터널 입구를 가리켰다. 터널 바로 앞에는 구근과 다발을 판매하는 나무 가판이 자리했다.

    주위에는 수선화 구경을 끝내고 돌아서는 커플들이 가득했다. 애인이 건넨 수선화 다발을 안은 여자들은 나만큼 행복한 표정이었다.

    나와 그녀들에게 오늘의 수선화는 단순히 꽃이 아니었다. 노부부가 호미와 삽으로 평생을 직접 이 공곶이 꽃밭을 일군 때문일까. 노부부로부터 시작된 것인지 공곶이의 수선화를 찾은 많은 이들의 눈빛에는 사랑이 서린 듯했다.

    처음 나에게 사랑이라는 의미로 왔던 수선화, 이 꽃은 앞으로도 여전히 그 의미를 간직할 듯하다.

    김현미 기자 hm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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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곶이에 설치돼 있는 데크에서 관광객들이 파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공곶이를 지금의 수선화 천국으로 만든 이들은 강명식·지상악 부부다. 1956년 부인 지씨를 만난 강씨는 이듬해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 삼아 산보를 나갔다 이곳, 공곶이를 발견하게 된다. 바다와 섬, 산자락이 어우러진 풍경에 감동받은 강씨는 10년 뒤 이곳에 살던 사람이 이사를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본격적으로 공곶이에 터를 잡고 호미와 삽, 곡괭이로 산 속 꽃밭을 만들게 됐다. 현재 13만㎡가 넘는 공곶이에는 동백나무, 종려나무, 조팝나무, 수선화 등 50여 종의 나무와 꽃이 시간을 달리하며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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