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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노래로 봉사하는 가수 김정한씨

음악으로 행복 전하는 게 삶의 기쁨입니다

  • 기사입력 : 2015-04-15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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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하며 봉사하는 가수 김정한씨가 지난 14일 창원 희연병원에서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노래봉사를 하고 있다./전강용 기자/



    중학교 2학년 때
    기타 선율에 반해
    음악 배우기로 결심

    고등학교 졸업 후
    레코드사 오디션 합격
    가수 활동 시작했지만
    집안 사정 어려워
    기타 메고 전국 유랑

    마산 정착한 지 30여년
    2002년 라이브카페 열어
    주말이면 복지시설서
    노래 봉사로 재능기부

    “음악은 모든 사람
    치유하는 힘 있어
    몸은 힘들어도 즐거워”


    나를 위해, 남을 위해 노래하고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를 위해 노래하니 메마른 영혼이 풍요로워지고, 남을 위해 노래하니 천국의 달란트가 차곡차곡 쌓일 것 같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가수이면서, 사람이 그리운 복지시설 등을 찾아 노래 봉사를 꾸준히 하는 사람을 만났다.

    창원시 의창구 중앙동 오거리에서 라이브카페 ‘엘콘도르 파사’를 운영하고 있는 가수 김정한(59)씨. 최근 만난 김씨는 또다시 태어나도 ‘노래하는 사람, 노래로 봉사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힘줘 말한다.


    ◆소년, 음악을 만나다

    김씨가 평생 음악과 함께 살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그는 대구시 성당동에 있는 동네 탁구장을 자주 찾았다.

    거기서 운동하고 있으면 탁구장을 관리하던 형님이 곧잘 기타를 쳤는데, 그 기타 소리에 반해 음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단다. 지하 탁구장에 울려 퍼지는 기타의 저음줄 공명과 고음줄의 명쾌한 선율이 어우러지는 하모니가 그를 음악 세계로 끌어들인 것이다.

    우연하게 들은 기타 소리에 반해 음악에 빠졌지만, 어쩌면 김씨가 음악을 선택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아버지는 풍금과 노래를 잘했고, 어머니의 노래 수준도 가수급이었기 때문.

    부모의 음악적 DNA가 김씨에게 내재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막내 여동생 김은서(55)씨도 현재 대구에서 라이브 가수로 활동하고 있단다.

    기타를 배우기로 결심했지만 학원비가 없었다. 기타를 잘 다루는 선배와 지인들을 찾아가 ‘동냥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꼬박꼬박 모은 용돈과 초등학교 때부터 수집한 우표를 몽땅 팔아 기타도 샀다.

    하지만 어렵게 장만한 기타의 명줄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범대학에 진학해 반듯한 교사가 되길 바랐던 아버지는 밤마다 기타 치는 아들을 보면 눈에 천불이 났던 모양이었다.

    “와장창.”

    어렵게 구입한 기타는 중학교 3학년 때 목(넥)이 두 동강 난 채 버려졌다. 책보다 더 사랑받은 기타에 아버지의 노여움이 미친 것이다.

    기타를 칠 수 없는 상황에서 뜻밖의 행운이 다가왔다. 강원도 정선에서 탄광 노동자로 일하던 삼촌이 집에 찾아왔고, 4명의 조카들에게 뭔가 선물하고 싶어 했다.

    그때 기타를 사 달라 청했고, 삼촌은 조카의 소원을 들어줬다. 아버지는 기타를 선물한 동생이 미웠지만, 탄광에서 목숨 걸고 받은 임금으로 조카의 기타를 사줬으니 더 이상 그 기타를 원망하지 않았다.

    김씨는 “그 이후 아버지께서 공부하면서 기타 치라며 허락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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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가수가 되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자마자 탄력을 붙였다. 학교에 있어도, 길을 걸어가도, 집에 가도 눈에 보이는 것, 잡히는 것은 온통 여섯 줄 기타뿐이었다. 고교 2학년이 되자 어른 뺨칠 정도의 고수가 됐다. 덩치가 커 고교생 때부터 대구 다운타운가 업소에서 아르바이트 요청이 들어왔다. 대학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시즌이 되면 대학생 차림으로 기타 치고 노래하며 형·누나들의 흥을 돋워줬다.

    그런 그에게 가수의 문이 열렸다.

    1976년 3월 고교 졸업 직후 개최된 오아시스레코드사의 대구지역 신인가수 오디션에 합격한 것이다. 가수가 되자 대구 미8군 캠프워커의 전속 컨트리 싱어로 활동하면서 새 출발했다. 또 가수로 이름을 떨치기 위해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울산 마산 포항 등 전국을 돌며 포크송 물결을 선도했다. 당시 수도권에서 포크송 물결을 주도했던 가수는 트윈폴리오, 이장희, 하남석, 서유석씨이며, 그는 주로 전국 지방도시를 주름잡았다.

    가정 사정이 넉넉지 않아 중앙무대 진출은 미리 포기했다. 앨범을 내고, 중앙 방송에 명함을 내밀려면 실력도, 운도, 돈도 있어야 했지만 당시 그가 가진 것은 실력뿐이었다. 어머니는 빚을 내서라도 뒷바라지해 주려 했다. 하지만 자칫 실패하면 집안에 큰 누를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그를 만류했다.

    “어머니, 제가 벌어서, 제 길을 가겠습니다.” 그는 기타 하나 메고, 동전 한 닢 쥐고 전국 유랑에 나섰다.

    전국을 떠돌다 마산에 정착한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다. 군대를 제대한 1980년대 초반 마산 창동의 한 음악카페 사장이 파격적인 개런티를 제시하면서 그냥 마산에 눌러살게 됐다.

    그 뒤 남성동에서 ‘정한음악학원’도 운영하며 후학들을 양성해 왔다.

    주로 마산에서 활동하던 그가 2002년 창원 중앙동 오거리에 라이브카페 ‘엘콘도르 파사’를 오픈했다. 라이브 무대가 생소했던 당시 그가 오픈한 라이브카페는 이국적인 정취를 선사했다. 창원지역 기업체 음악동아리 회원들이 카페에서 색소폰, 기타, 드럼을 치며 실습했고, 음악문화를 향유하는 친교공간으로 활용하기까지 했다.

    그는 “저도 제 가게에서 노래하고 싶지만 손님들이 더 부르려 해 제 차례는 없다”며 웃어 보였다.


    ◆중년, 봉사에 앞장서다

    그는 자신의 호가 음파(音波)라고 했다. 지인인 이재명 교수가 ‘소리로 남들에게 봉사하라’는 의미로 지어줬단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만을 위해 노래하지 않았다. 손님에게만 노래하지 않았다.

    사람이 그리운 사람들. 병들거나 장애가 있어 공연장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목청을 열었다. 1주일 내내 카페에서 연주하고도, 봉사하는 주말이면 표정을 밝게 만들어 여섯 줄 기타를 울렸다.

    노래를 듣고 기뻐하는 사람들. 손뼉 치며 따라 부르는 사람들. ‘여자의 일생’을 부를 때 눈물 흘리던 요양원 할머니들이 그를 지탱시켰다. 피곤이 밀려왔지만 희열을 느끼는 그들을 보면서 동시에 희열을 선물 받았다. 그래서 자주 가는 복지관, 요양원, 병원, 노인시설, 평생교육센터에서는 그의 칭찬에 침이 마를 정도다.

    특히 1999년부터 경남재즈오케스트라와 함께 경남장애인재활협회 소속 장애인들에게 펼치는 노래 봉사는 지역에서 유명한 연례행사가 됐다.

    그는 “노인들이 많은 곳에 가면 아버지·어머니를 본 듯해 신이 더 난다”면서 “저의 작은 재능으로 많은 분들이 재미를 느끼고 기쁨을 누린다고 생각하면 몸은 힘들어도 또 다른 봉사의 에너지가 생긴다”고 말했다.

    도심지 카페에서 탁한 공기를 많이 마신 그는 앞으로 전원카페를 만들고 싶단다. 바닷가 어느 한 곳에서, 경치가 좋은 곳에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살린 전원카페를 지어 음악인생을 이어가고 싶단다. 신선한 곳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지인들도 만나 평생 살처럼 붙어 다닌 음악을 계속하고 싶단다.

    “음악은 모든 사람을 치유하는 신비스런 힘이 있다”는 그는 “사람을 젊게 만드는 좋은 노래를 많이 불러 지역 사회와 호흡하는 라이브 가수가 되겠다”고 했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노래, 남을 행복하게 하는 노래를 부르는 그의 삶이 참으로 부러웠다.

    조윤제 기자 ch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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