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0일 (토)
전체메뉴

[은퇴 베이비부머의 인생 2막] 아파트 관리소장 여성모씨

퇴직 전 따놓는 ‘자격증’은 새 길 갈 수 있는 ‘통행증’
28세때 공기업 입사 후 30년간 근무후 정년퇴직
퇴직하기 전부터 아파트관리소장 목표로 주택관리사 자격증 취득

  • 기사입력 : 2015-04-19 22:00:00
  •   
  • 메인이미지
    여성모 소장이 아파트 조경 작업에 필요한 도구를 손수레에 실은 후 끌고 가고 있다./김승권 기자/


    관공서 또는 공기업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이들이 은퇴 후 새 직업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귀농·귀촌을 하거나 아니면 개인사업으로 인생 2막을 설계하는 게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서비스 직업을 선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명예와 자존심을 단번에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밀양에서 만난 여성모(61)씨는 이런 드문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는 30년 동안 국내에서 손꼽히는 ‘공기업 직함’을 유지하다 퇴직 후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새 출발을 했다. 아파트 민원 해결이 주요 업무인 관리소장이라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평범하지만 늦게나마 사람들과 함께하며 소통을 배우고 인생의 보람을 찾고자 하는 바람에 있었다.

    여 소장은 자신의 후반기 인생을 이렇게 바라봤다.

    “공기업에 근무했다는 자존심요? 아예 버렸어요. 남은 인생은 보람이 중요하죠.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고, 근무하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게 제2의 인생 아닐까요.”

    여 소장은 지난 2011년 58세 나이로 공기업을 정년 퇴직했다. 28세 때 공채 입사 후 30년 만에 ‘와이셔츠’를 벗었다. 그는 50세 때부터 퇴직 후 삶을 구상했다. 그가 계획한 제2의 인생은 아파트관리소장이었다.

    “50대가 되면서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죠. 60대에도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는 신체적 여건이 되는데 뭘 해야 하나 막막했어요. 그나마 아파트관리 쪽은 잘 알고 있어서 관리소장을 하기로 마음먹고 미리 준비를 했었죠.”

    여 소장은 공기업을 다니는 동안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러나 퇴직이라는 현실을 막상 접하자 막막했다. 2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집에 박혀 있는 시간은 고통이었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50대 후반 나이에 재취업은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주택관리사 자격증이 있었지만 아파트관리소장에 대한 실행이 쉽지 않았다.

    “회사, 특히 공기업은 문제가 있어도 회사 차원에서 해결이 되는 곳이죠. 울타리, 온실 속에 근무했다고 볼 수 있죠. 막상 사회에 재진출하려 하니 스스로가 생존을 해나가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알았죠.”

    2년의 공백 기간을 깨고 아파트관리소장직에 문을 두드렸다. 결심까지 쉽지 않았지만 월급도 적고 평범한 일이지만 보람이 크지 않을까 마음을 다독거렸다.

    지난 2013년 12월 아파트관리 용역업체를 통해 밀양시 내이동 한 임대아파트관리소장으로 채용됐을 때 가족은 대환영을 했다. 창원에 살고 있어 출퇴근 시간이 왕복 2시간 정도로 짧지 않았지만 새 직업을 찾았다는 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관리소장이라는 게 만만치가 않았다. 평소 낙천적으로 살아온 여 소장도 초창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아파트관리사무소는 일종의 대민서비스와 같죠. 원래 공용부분만 관리하던 게 요즘은 서비스업종이 된 것이죠. 초창기에는 서비스 정신이 좀처럼 몸에 배지 않았죠.”

    다른 서비스업처럼 친절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 아파트관리소 직업이었다. 이유 없이 쓴소리를 내는 주민도, 화를 내며 민원을 제기하는 주민도 많았다. 그때마다 여 소장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되뇌었다.

    “처음에 아파트 내부적으로 많이 시끄러웠어요. 쓰레기 분리수거 문제부터 쓰레기 악취, 파리, 모기…. 민원의 연속이었죠. 층간소음 문제까지 심각했죠. 잦은 민원에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그래서 관리사무소 한편에 역지사지 문구를 붙이고 매일 쳐다봤습니다. 무엇이든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해결 안 될 일이 하나도 없다고 저 자신을 매일 바로잡았죠.”

    여 소장의 역지사지는 소통으로 연결됐다. 홀로 사는 노인 비율이 높은 임대아파트에서 갈등관계에 있던 주민과 주민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 셈이다.

    “사실 이웃 간 층간소음이라는 게 관리소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이웃끼리 해결할 문제죠. 그런데 해결이 안 되니 제가 직접 찾아다녀야 했죠. 이웃 간 서로 화해를 시켜주고 소통하며 사는 방법으로 유도했죠. 또 술을 드시고 저한테 언성을 높인 주민은 다음 날 꼭 찾아가 이야기를 하면서 풀어갔죠. 주민들의 이야기를 주민들의 입장에서 다 들어주었어요.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나니 신기하게 소통이라는 게 생겼고 갈등 없는 아파트로 정착이 돼 가더라고요.”

    여 소장은 자신도 모르게 친절이 몸속 깊이 배었다. 주민에게 항상 먼저 인사하고, 반드시 일어서서 응대를 한다. 이제는 주민들도 김치와 음료수 등을 관리소에 가져다주며 고맙다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전 직장에서 알 수 없었던 책임감을 더 많이 경험했고, 또 그에 따른 보람의 무게도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여 소장은 관리소장을 은퇴 인생 첫 페이지로 여긴다. 두 번째, 세 번째 페이지도 구상하고 있다.

    “제2의 직장을 갖고 산다는 게 보람이 크지만 장기적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죠. 얼마 가지 않아 젊은 사람들도 관리소장에 많이 몰릴 것이고, 나이 많은 우리가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니까 그때는 물러날 생각이죠. 그래서 또다시 다른 삶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는 조경관리사 자격증을 이미 취득했고, 조경기능사 자격증도 실기 통과만 남겨 두고 있다. 올해 중순에는 도배기능사에 도전할 계획이다. 건강이 유지되는 한 하고 싶은 일을 놓지 않을 생각이다. 그래야 또 다른 보람을 찾을 수 있고, 건강도 유지된다고 믿고 있다.

    “은퇴를 앞둔 분들께 꼭 한마디 하자면 제2의 인생은 퇴직하기 전 준비를 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자격증 한두 개는 구비해야 하죠. 큰일은 나이 들어 못해요. 그냥 평범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여 소장은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리어카를 끌고 화단으로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그러면서 “난 성공한 사람도 아닌데…”라며 쑥스러워했다.

    인생 2막은 돈벌이가 아닌 듯하다. 화려하지 않고 큰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앞서 인생에서 해보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평범한 삶! 그 속에서 우러나는 보람이 사실은 더 화려한 제2의 인생으로 남지 않을까. 여 소장의 2막 인생에서 느낀 힌트였다.

    김호철 기자 keeper@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김호철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