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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6·25전쟁 개전 65주년을 맞으며- 이종판(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아태연구센터 연구위원)

  • 기사입력 : 2015-04-2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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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개전 65년이 되는 해다. 20살 나이에 전쟁에 나갔던 청년은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3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피해를 냈다. 전투병력 손실만 해도 유엔군이 한국군을 포함해 18만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 측은 북한군 52만명, 중공군 90만명의 병력을 잃었다.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남한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인민재판 등 무자비한 방법에 의하여 ‘반동계급’으로 몰려 처형당한 억울한 희생이었다. 북한은 8만5000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한민국에서 끌고 갔으며, 반대로 북한지역으로부터는 300만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학정을 탈출했다.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명 정도로 추정됐는데, 그 가운데 4분의 1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했다.

    무력통일은 6·25전쟁을 통해 충분한 교훈이 도출됐다. 한반도의 전쟁은 주변국 이익에도 파급되어 중국과 일본은 약방의 감초처럼 개입했다. 최초로 중국과 일본이 개입됐던 663년의 백강전투에 일본은 3만여명과 400여척의 선박을 투입했다.

    6·25전쟁기간에도 일본군을 대신해 들어온 미군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지원했다. 북한에는 중국과 소련이 개입하였으나 이들 세력들은 남북한 어느 한쪽의 통일을 위해 개입한 것은 아니었다. 코미디는 김일성은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도망하여 숨어 다니고, 이승만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서울이 함락되자 고위층만 한강을 건넌 뒤 한강교를 폭파해버려 500~1500명인지 통계가 잡히지 않을 정도의 희생이 있었다.

    정치지도자들의 큰소리 ‘뻥 정치’는 무력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 슬로건이 이승만의 북진통일과 김일성의 국토완정(國土完整)이다. 김일성이 국토완정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북한정권이 수립일 다음날 9월 10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1차 회의였다. 김일성은 “남북전체의사에 근거하여 수립된 중앙정부는 통일된 민주자주 독립국가를 신속하게 건설하기 위해서 전력으로 국토완정과 민족통일을 보장한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이승만도 무력에 호소해서라도 통일을 완수한다. “우리의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목숨 바쳐 통일” 국민을 통일신드롬에 편승·부응하기 위해 이승만의 일련의 연설은 북진통일이었다.

    이승만은 한국의 체면을 구긴 채 일본 야마구치에 망명정부 부지를 요구했다. 야마구치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출발지였다. 야마구치현은 6·25이전부터 ‘조선정보실’을 설치해 밀정을 한반도에 파견해 정보를 수집했고, 밀정의 보고를 받은 다나카 지사는 요시다 총리를 찾아가 “정말 북한이 침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 후 1주일 만에 6·25전쟁이 터졌다. 북한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서울은 일선 지휘관을 모아 놓고 술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할 말을 잊게 한다.

    낙동강 방어선 위기시에 일본외무성에서 야마구치 현에 지시된 전보는 “한국정부는 6만명 수용할 수 있는 망명정권을 야마구치 현에 설치하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립투사인 이승만 정권의 실상을 알만한 경구가 아닐 수 없다. 손자의 말이 생각난다. “화풀이 전쟁을 하지 마라. 죽은 사람이 살아나거나 멸망한 나라가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은 경거망동한 전쟁을 삼가라는 것이다. 지금의 남북지도자는 6·25전쟁을 한반도의 마지막 무력충돌로 봉해야할 것이다.

    이 종 판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아태연구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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