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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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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베이비부머의 인생 2막] 블루베리 농꾼 서상태씨

‘2막 농사’ 잘 지으려면 ‘1막 터전’ 잘 가꿔야죠
[꿈꾸자, 경남Ⅱ] (9) 대학교 교직원에서 블루베리 농장주 된 서상태씨

  • 기사입력 : 2015-04-26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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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상태씨 부부가 밀양시 용평동에 나무와 흙으로 지은 전원주택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마당 화분에도 블루베리를 심어 놓았다./김승권 기자/

    사람도 만나보기 전에 먼저 집을 보고 말았다. 얼핏 봐도 보통 집이 아니다. 해를 깊숙이 끌어들이는 큼지막한 창과 아기자기한 화분이 놓여 있는 데크, 들장미 넝쿨이 휘감긴 담장은 분명 전형적인 전원주택 구조인데, 뭔가 확실히 다르다. 지붕이 한옥에 쓰이는 맞배지붕처럼 뾰족하고, 기둥이 울퉁불퉁 나무 자란 모양 그대로다. 집 안을 보고 확실히 알았다. 오랫동안 고심해 지은 집이란 걸. 벽지는 모두 흰 한지, 서까래가 걸쳐진 마룻대에 상량문(上樑文)이 쓰인 전원주택이라니. 기초만 시멘트로 시공했고, 벽은 나무틀을 짜 넣고 빈 공간을 흙으로 메웠다. 한옥 짓는 전통방식 그대로다. 보온에 취약한 흙벽을 보완하기 위해 단열재로는 압착시킨 울(wool)을 썼다. 정원엔 갖가지 야생화가 피고 난이 자란다. 이만큼 둘러보고 나니, ‘이 집은 어떤 사람의 집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양복 안주머니에 애지중지 넣고 다니는 로또처럼, ‘언젠가 이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 손수 나만의 집을 짓겠다’는 계획을 가슴속에 고이 간직한 직장인이 많다. 서상태(56)씨도 ‘내 손으로 집을 짓겠다’는 막연한 꿈을 구체화시키면서 인생 2막을 연 사람이다.

    그는 지난 30여 년간 창원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동안 비염과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서씨는 그 원인을 ‘주거환경’에서 찾았다. 시공부터 마감까지 화학물질이 필수적으로 들어간 아파트가 병의 원인이 되거나 악화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전원생활을 꿈꾸게 됐고, 조금 더 욕심을 내 친환경적인 한옥을 짓고 싶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거기에 생활의 편리함도 무시할 수 없어 한옥과 양옥의 퓨전을 시도했고, 일꾼을 거의 쓰지 않고 천천히 직접 지었다. 때문에 서씨의 집엔 흙벽과 샹들리에가 혼재하고 한지가 발린 미닫이문과 아일랜드 식탁이 혼용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서씨는 이 퓨전가옥에서 산 지 6개월 만에 비염과 두통에서 해방됐다.

    서씨는 1984년 경남대학교에 통신교환업무 담당으로 입사했다. 입사 후 10년은 통신 업무를, 이후 17년 동안은 시설관리실에서 건물 유지, 개·보수 업무를 도맡아 했다. 퇴직 전 2년 반은 공과대학 교학지원실장을 지냈다. 40대 초반부터 귀농을 염두에 두고 15년 동안 틈틈이 땅을 물색했다. 처음엔 무작정 노후에 아내와 함께 살 집을 짓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면, 땅을 보러 다니면서 ‘퇴직 후엔 무얼 하고 사는가’ 하는 실제적이고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사실 서씨는 농사 경험이 전무하다. 다만 평소 난 키우기를 즐겨하고 실제로 갖가지 난을 프로급으로 다룬다.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 믿고 여러 가지 밭작물을 수소문하던 중 블루베리를 접하게 됐고, 혼자서도 감당할 만한 적당한 나무 크기와 썩 괜찮은 소득에 매력을 느꼈다. 이후 직장을 다니며 주말마다 책이나 강연을 통해 선진 농법을 배우고 농장을 찾아다니며 재배방법을 익혔다.

    2010년 밀양시 용평동에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2011~2012년엔 집을 설계해 짓고, 블루베리 50그루를 정원에 심어 시험 재배를 시작했다. 그리고 2014년 9월에 근속 30년을 한 달 앞두고 퇴직 선언을 했다.

    “좋은 직장 너무 쉽게 놓는다고 주변에서 많이 말렸죠.” 하지만 그는 과감하게 ‘꿈의 직장’을 벗어버린다. 블루베리 농사가 늦어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곧 신품종을 추가해 노지에 300그루, 하우스에 400그루를 심었다. 하우스는 5월 말~6월에, 노지는 6월 말~8월에 수확을 한다. 용평동 그의 집과 부북면 운지리의 농장에는 이제 막 꽃이 떨어진 자리에 앙증맞은 열매가 알알이 맺힌 블루베리 묘목들이 줄지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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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상태씨가 밀양의 비닐하우스에서 블루베리를 돌보고 있다./김승권 기자/

    서씨가 내린 ‘농사’의 정의는 ‘내가 먹는 음식을 기르는 일’이다. 농사짓는 사람 자신이 먹는다고 생각하면 ‘보기 좋게 키우기보단 거칠게 강인하게 키운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씨는 시험 재배를 통해 농약을 적게 쓰는 대신 시비를 어떻게 하느냐, 또 배수시설을 어떻게 만들어주느냐가 블루베리의 질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블루베리는 약알칼리에서 잘 자라는 보통 작물과는 달리 산성 토양에서 잘 자랍니다. 때문에 상토를 만들 때 피트모스라는 수입 흙에 잣 껍데기와 소나무 껍질을 섞어 주죠.” 또 미네랄이 풍부한 천매암 발효액과 아미노산이 많은 생선 발효액을 블루베리 줄기와 잎사귀에 액비로 뿌려주는 등 시비에 공을 들인다. 물을 좋아하는 블루베리 특성을 잘 파악해 골고루, 충분히 물을 줄 수 있는 관개시설도 직접 시공했다.

    서씨는 이 모든 작업 과정을 세심히 기록하고 분석해 시기별·품종별로 재배방법을 시스템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자신처럼 블루베리 농사꾼으로 인생 2막을 여는 사람들이 지침으로 삼을 만한 ‘매뉴얼’을 제시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 수확철이 지나 비교적 한가한 가을에는 블루베리 잎을 따 차를 만들 계획도 구상 중이다.

    2000여㎡에 달하는 서씨의 농장 이름은 현종 베리팜. ‘현종’은 그의 아호로, 어질 현(賢)에 좇을 종(從)을 쓴다. “요즘은 아호 그대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농장에 나와 오후 6시 정도에 퇴근합니다. 모두 제가 정한 시간, 작업량이죠. 30년 동안 타인이 정해준 일과를 따랐다면 이젠 순전히 제 주도적으로 삽니다. 그러니 화날 일도 없고, 싫은 소리 하거나 들을 일도 없고, 한없이 마음이 어질어집니다.”

    하지만 서씨는 퇴직자들이 경계해야 할 따끔한 충고도 아끼지 않는다. “저는 계획을 면밀히 세우고 퇴직을 했음에도 퇴직 직후에 굉장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공허하고 아쉽고, 한없이 나태해지고요. 2막은 1막을 열심히 산 사람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일단 직장 열심히 다니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기본적 토대가 돼야 2막을 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경제적 여건도 갖춰지잖아요? 블루베리가 저를 가르치더라고요. 좋은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성실히, 꾸준히 준비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김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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