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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웃음기 띤 장승 만드는 최해렬씨

한국장승진흥회 회장

  • 기사입력 : 2015-05-06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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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시 일목헌 목재체험관에서 최해렬 (사)한국장승진흥회 회장이 진열된 장승 사이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성승건 기자/

    수입담배 도매업 하다 새로운 직업 찾던 중

    어릴적 아버지가 장승 만들던 기억 떠올라
    장승꾼 되기로 결심

    지난 20여 년간 무서운 장승 틀 벗어나
    포근한 장승 만들어

    6년 전 장승 분야
    대한명인 268호 지정

    후계자 없어 아쉬워


    작품 사장되지 않도록 상설 전시실 갖는 게 꿈


    “대단하신 분 같네요.”

    “아니요. 그냥 조용히 살아가려 할 뿐입니다.”

    진주에서 ‘일목헌 목재체험관’을 운영하는 최해렬(62) 선생과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사)한국장승진흥회 회장을 맡고 있는 최 선생은 대한명인 268호다. 대한명인회에서 선정하는 명인은 각 분야에 1명뿐이다. 그는 6년 전 장승 분야 명인이 됐다.

    “젊은 사람이 나타나 제 꿈을 이어준다면 저의 간까지 떼어줄 용의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직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어갈 사람이 없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장승을 만든 지 20여 년.

    최 선생은 ‘장승꾼’으로 불리고 싶어 한다.

    “꾼이라 하면 좀 낮춤말로 들리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꾼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 생각해요. 예술인으로 보지 않아 천시받기도 했지만, 어차피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지금까지 왔어요. 꾼이라 불리는 게 이젠 더 편안해졌죠.”

    ◆장사를 접고 장승에 눈 뜨다

    1988년. 그는 수입담배 도매상이었다. 고향인 부산에서 영업을 하다 진주로 내려왔다. 연고가 없는 진주에서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워낙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기에 힘든 기간은 1년 만에 이겨낼 수 있었다.

    “서부경남쪽에 안 다닌 곳이 없었죠. 당시 수입담배는 대리점 마진이 10%였는데 잘하면 40% 넘을 때도 있었죠. 이 장사를 그만둘 때 월 매출이 5억원이었을 정도로 화려했었죠. 거제에서 합천 해인사까지 직원 1명을 두고 영업을 했죠.”

    그러나 수입담배 장사는 오래 할 수 없었다. 주변의 시선 때문이었다.

    “양담배 판다고 매일 욕을 먹었죠. 나름대로 내 가족을 위해 자부심을 갖고 수입담배를 해 왔는데…. 그때부터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어요.”

    1990년쯤. 그는 장사를 모두 내려놨다. 이곳저곳을 다니다 문뜩 “이거다” 하는 확신을 가졌다.

    “장승이 대접받지 못한 시기에 지리산에서 누가 장승을 만드는 걸 본 뒤 7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기억이 났죠. 옛날 아버지가 장승 만드는 모습이 떠오르면서 나도 저걸 한번 해봐야겠다고 딱 느꼈죠. 그런데 장승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른 지역에 문헌도 찾아보고 하면서 장승이 너무 ‘미개척 분야’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오히려 그를 더욱 장승에 빠져들게 한 계기가 됐다.

    “알려지지 않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아니까, 정말 이거 한번 해보자 더욱 다짐했죠.”

    ◆행복을 주는 포근한 장승 개척

    그동안 그가 탄생시킨 장승은 이제 셀 수조차 없다. 최 선생의 장승들은 하나같이 밝고 웃는 ‘행복한’ 표정이다. 힘든 외길 활동을 지탱해줄 수 있었던 자신만의 ‘고집’이 아니었나 싶다.

    “누가 장승을 만드는 걸 보니 너무 무서웠죠. 남이 봤을 때 호감이 가고, 갖고 싶다 할 정도로 만들어야지, 무섭게, 혐오스럽게 만들면 안 된다는 정신이 확 박혔죠. 저도 몇 차례 무섭게 만들어 보기도 했는데 곧바로 포근함을 가진 장승만 만들어 왔죠.”

    옛날 장승은 마을에 잡귀를 막기 위한 방어 목적이어서 최대한 무섭게 만들어졌지만, 시대가 변화하면서 그 같은 신(神)적 부분은 사라졌다고 최 선생은 여겼다. 그래서 장승 형상에 대한 틀을 과감히 바꾸기 시작했다.

    “장승은 하나의 우리 민족의 민속일 뿐, 민속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해가야 하는데 장승 만드는 사람들은 그런 개념이 전혀 없었어요. 요새 장승에 잡기 막는 역할이 어디 있습니까.”

    참 솔직한 표현이다. 그의 장승 작품들은 아내가 운영하는 돼지국밥 식당에 전시(?)돼 있다. 식당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의 기운을 주기 위해서이다. 식당 곳곳에 진열된 짝을 이룬 장승들은 모두 ‘껄껄’, ‘허허’ 웃고 있다.

    최 선생의 가장 자랑할 만한 장승은 지난 2004년 진주 진양호에 만든 장승이다. 높이가 무려 12m이며, 무게는 18t에 달한다. 둘레는 4.5m이다. 그러나 지난해 철거를 했다. 나무의 내구성이 떨어져 10년 이상을 버티지 못한 탓이다.

    ◆하나라도 똑바로 만들자

    그는 반드시 목적이 있을 때만 장승을 만든다. 아무 생각 없이 취미로 장승을 만들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한다든지, 누군가가 주문을 한다든지, 전시를 한다든지….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만 조각칼을 든다.

    그래서 최 선생의 장승은 똑같은 게 없다.

    “첫째 어디 놓을 것인가가 정해지면 크기가 정해지죠. 그리고 형상이 나오는 것이죠. 그냥 생각 없이 만들면 장승꾼이 아닙니다. 제 장승은 100% 다 다르죠. 비슷하게 보일 뿐이지….”

    소규모 장승을 대량으로 생산해 많이 팔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산업화가 되면 장승꾼이 먹고살 길이 열려 좋겠지만 자신만은 그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장승에 수입목재를 쓰지 않고 인위적 색깔을 넣지도 않는다. 좋은 나무 빛깔 그대로를 드러내는 방식을 고수한다.

    “수입목재는 가볍고, 칼발 잘 받고, 값도 싸고 선호할 만하겠죠. 거기다 칠까지 하더라고요. 좋은 나무를 갖고 하면 감출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색깔을 넣지 않는데 제가 가진 독특한 특징이고, 그걸 고수해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면을 유지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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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장승진흥회 최해렬 회장

    ◆일목(一木) 최해렬

    최 선생은 자신의 아호(雅號)처럼 살겠다고 했다. 작고하신 분이 지어준 ‘일목(一木)’. 일목에는 ‘나무와 하나가 되자’는 의미가 있다. 또 ‘일(一)’은 넓은 의미가 있고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도 있고, 시작의 의미도 있는 등 여러 의미가 있다고 했다.

    “제 아호는 일목도 있고, 목촌, 청송, 고송도 있어요. 다 나무와 관련 있지요. 또 제가 나무를 좋아하고요. 이 일을 하는 게 내 팔자라고 생각해요.”

    최 선생은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 있다. 지금까지 만든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작품까지 한곳에 모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장승과 함께한 모든 작업, 작품들이 제가 죽고 나면 소멸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거창하지 않더라도 모든 장승 작품들이 사장되지 않도록 상설 전시실 하나 만들어 놓고 싶어요. 또 후원회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덕을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김호철 기자 keeper@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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