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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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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5) 서영은/ 꽃들은 어디로 갔나

  • 기사입력 : 2015-05-07 14: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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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한 친구가 있다. 친구는 "어리고 예쁠 때 수저 한 벌 가지고 시집 갈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는데, 그 바람이 이뤄진 것 같았다.
    바야흐로 미국발 금융위기가 광풍처럼 휘몰아친 2008년 무렵이었다. 나를 비롯한 대학동기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취업난에 지쳐가던 시절, 친구는 새벽녘 막 피어난 한 떨기 꽃처럼 싱그러운 얼굴로 예물을 고르고 한복을 맞추고, 신접살림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했다.
    친구는 시어머니가 될 신랑 어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따랐다. 신랑의 어머니 또한 자신을 딸처럼 여기며 살뜰히 챙긴다고 자랑도 했다. 예단이니 폐백이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도 했다. 그건 전공서적과 동영상 강의, 중앙도서관으로 점철된 내 단조로운 일상과는 전혀 다른 법칙의 세계였다.
    활짝 핀 친구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괜시리 내 가슴이 설레고 콧잔등이 따뜻해지면서 배가 간질거렸다. 일생동안 한 남자의 울타리 안에서 지순한 사랑을 받는 일, 그 사랑을 사람들 앞에서 공고히 약속하는 일. 그건 늘 그렇게 젊은 처자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봄바람 같은 건가 싶었다.
     
    "어느 날 그는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식을 올려줄 조용한 절을 찾아보겠노라고 했다. 그녀는 흰색 명주로 한복을 맞추었다. 노모는 자기 여동생을 포함한 가족, 친지, 가까운 친구 두세 명은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으나, 그녀는 이모 외에는 아무도 부르지 말라고 못 박았다. 영문을 모르는 채 그녀의 이모가 한복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달려왔다. … 밤 늦게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나 다름없었지만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예민했다. 서울 근교에 있는 용주사란 절에 갔더니 사십구재를 하고 있어서, 내일 아침 다른 절을 찾아가보려고 한다는 얘기였다. 전화를 끊고 그녀는 잠자기 전에 양치를 하려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문을 닫고 욕조에 걸터앉아 천천히 심호흡하듯 이를 닦기 시작했다. 입안에 거품이 하나 가득 고일 무렵 그녀는 벼락치듯 거품을 뱉어내고 그 입으로 전화통 앞으로 달려갔다. 구차해. 그만두자. 송수화기를 집어 들고 다이얼을 돌리다 말고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침이 아니라 치약이었다." -해냄/서영은/'꽃들은 어디로 갔나' 1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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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의 결혼식은 유쾌했다. 어린 신부였던 친구는 근엄한 얼굴의 시부모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허리와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섹시댄스를 선보였고, 나를 비롯한 신부 들러리들 또한 대체 무얼 어찌해얄지 감도 못 잡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결혼식 내내 우왕좌왕이었으니, 그야말로 볼만한 결혼식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신랑신부는 샴페인이 찰랑대는 잔을 부딪치며 3년 간의 연애에 종지부를 찍고 부부로 거듭났다. 친구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 보였고, 그 모습을 보는 나도 행복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잘 몰랐던 거다. 화려한 꽃으로 치장된 연회가 끝나고 관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 무대 위에 무엇이 남는지.

     
    "그녀에겐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전에의 혼자는 새처럼 가볍고 홀가분했으나, 이제는 낳은 일도 없는 불안이 업은 아기처럼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직 얼굴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변화는 이미 그녀의 삶의 밑뿌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 하얀 장미꽃을 한아름 안고 그녀는 초인종을 눌렀다. 가슴이 뛰었다. 다음 순간 철컹하고 대문 열리는 소리가 그녀의 뛰는 가슴에 찬물을 끼얹었다. 문을 닫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안에서 차르륵 하는 쇳소리와 현관문 잠금쇠 푸는 소리가 또 한 차례 찬물을 끼얹었다. 그녀는 자기가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사람이 여러 겹의 육중한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오싹 소름이 끼치도록 낯설었다.… 그녀 앞에 나타난 그는 그녀의 연인도, 얼마 전 절에서 식을 올린 나이든 신랑도 아니었다. 그는 거북처럼 오랜 자기 집을 무겁게 짊어진 한 노인이었다. 그를 만나러 오면서 가슴이 뛰었다는 사실이 스스로 무안스러워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를 찾아올 때마다 애가 탄 나머지 양쪽 턱 밑으로 땀이 흘러 갓끈을 맨 것처럼 보이던 그 남자는 이 집의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해냄/서영은/'꽃들은 어디로 갔나' 22페이지
     
    대학동기들이 하나둘 직장을 잡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친구는 아이를 낳았다. 친구의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배와 그 아래를 반듯이 가로지르는 뚜렷한 임신선을 보았을 때, 머지않아 문자메시지로 아이의 탄생을 알려왔을 때,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스무살 철부지로 만나 웃고 떠들던 친구가 어머니가 되다니. 칭얼대는 아이에게 능숙하게 젖을 물리고 등을 다독여 재우는 친구가 무척 낯설어 보였다.
    그랬다. 분명 친구는 달라져 있었다. 친구는 결혼식 때완 달리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댁식구들과 근거리에 살면서 자주 부딪히는 것이 힘에 부친다고. 그건 일종의 문화충격 같은 거라고. 마치 다른 인종의 사람들과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것만 같이 답답하다고. 애써 마음을 다잡아 봐도 물과 기름처럼 들떠 스며들기가 어렵다고. 나는 친구가 들려준 여러가지 '사건'들을 통해, '엄마'와 '딸'이 되기로 했던 시어머니와 친구가 이미 등을 돌린 채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엔 혼자 끙끙대며 울다가, 급기야 남편에게 해외지사로 파견을 나가자고 애원한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표가 나게 시댁 편을 들지는 않지만 아내의 눈물에도 무심하긴 마찬가지인 남편에게 친구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친구는 잠든 아이를 방에 누이고 돌아와 시큰대는 손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연애할 때 장점으로 보였던 평정심과 무던함이 사실은 이 남자가 가진 특유의 무심함과 게으름이었어. 그게 이제야 비로소 똑똑히 보이더라."
    그날부터 나는 친구의 시댁식구들을, 더 나아가 친구의 신랑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체로 선량한 사람들일 것이었으나 나로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내 친구를 고통스럽게 하는 '악의 축'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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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에게 힘든 부분은 그가 남편이 됨에 따라 부장품처럼 자신에게 따라온 갖가지 연줄들과의 관계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사람들이 망설임 없이 그녀를 '사모님', '작은 어머니' 등으로 호칭할 때마다 그녀는 그의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어 다리에 쥐가 났다. 그녀는 얼음물에 발 담그고 서 있는 왜가리처럼, 치마 밑에서 끊임없이 다리를 엇바꾸어가며 쥐가 난 발등을 꾹꾹 눌러대곤 했다. 그녀는 자신이 옆에 서 있을 때의 그의 목소리, 어조, 몸짓이 평소 그녀가 대하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것처럼 느껴져 때로는 웃음이 터질 것같았고, 그가 연기를 함으로써 감추고 싶어 하는 그 무엇의 뚜껑을 확 벗기고 싶은 충동을 가만히 누르곤 했다. 세상의 아내들 모두에 대해서도 '쳇, 이런 걸 감추고 살아왔단 말인가', 하는 어이없는 배반감 또한 없지 않았다." - 해냄/서영은/'꽃들은 어디로 갔나' 163 페이지
     
    어느덧 친구가 결혼을 한 지 7년이 지났다. 그 사이 친구의 얇은 눈매와 앵두 같은 입술을 쏙 빼닮은 둘째아이도 태어났다. 얼마 전 친구의 집에 오랜만에 다녀왔다. 칭얼대는 둘째를 달래며 서로의 근황을 묻는라 정신없이 점심을 해치우고 나자, 친구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요구르트와 과일을 꺼내 간식을 준비하기 바빴다. 학원을 마치고 돌아올 첫째를 위해서였다.
    식탁에 앉아 사과를 깎고 있는 친구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사이 친구는 또 달라져 있었다. 친구는 끝없는 육아와 살림에 체력이 소진돼 입원도 두어 번 했었고, 아파트 융자를 갚느라 허덕이고 있으며, 여전히 시댁과는 원활한 소통이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친구는 이제 더이상 혼자 서럽게 울거나 남편을 붙잡고 닦달하지 않았다.
    인정할 것은 깨끗이 인정하고, 기대는 그저 기대로 남겨두는 것이 현명한 결혼생활이라는 걸 알아버린 친구. 친구는 어느덧 '노련한 기혼자'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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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때문이냐구요? 아니요. 사랑은 진즉 당신과의 결혼생활에서 이미 메말라버린 걸요. 우리는 지순한 사랑으로 부부연을 다하기에는 너무 업(業)이 큰 관계였던가 봐요. 나는 당신을 휠체어에 태워 병원의 복도를 돌며, 이 휠체어의 손잡이를 언제까지 잡고 버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답니다. 의식의 절벽 상태에 갇힌 당신을 나 혼자 내 남편이라 목 놓아 소리쳐야 하지만, 마음의 밑바닥에서 이 끔찍한 흉몽이 차츰 내게 주어진 생의 과제, 철저히 두 눈 똑바로 뜨고 치러내야 하는 생의 과제로 인식되었지요. 내가 좀 더 현명했었다면 이 흉몽을 치르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니에요. 절대로 아니에요. 나는 당신 인생의 어리석음까지 내 몫으로 지켜보고 깨우쳐야 했어요. 내 무의식은 나를 넘어 지긋지긋하게 매이는 사랑의 사슬을 끊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했어요. 사랑하는 당신! 이제야말로 나는, '나를 사랑한 당신, 당신을 사랑한 나'라는 삼생(三生)을 이어온 관계가 어마어마한 축복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의 무명(無明)을 깨우쳐주기 위해 평생 수고한 당신의 그 애끓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후생에서 우리 만나게 되면 확인하게 될 거예요." - 해냄/서영은/'꽃들은 어디로 갔나' 284 페이지

     

    그날 오후 나는 친구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서 있었다. 샤시를 있는 대로 활짝 열어두고, 아이가 학원을 마치고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큼지막한 가방을 양 어깨에 울러멘 아이는 뭐가 그리 신나고 재미난지 혼자 깡총거리기도 하고, 땅바닥에 있는 돌 따위를 건드려보기도 하고 나뭇잎을 따서 입에 물어보기도 하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이는 몰라보게 자라있었고, 쑥쑥 뻗은 팔다리에 제법 의젓한 총각 티가 나기까지 했다.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간다고 했다. 학원이 있는 아파트 상가부터 친구의 집까지는 꽤 먼 거리였는데도, 친구는 놀라운 집중력이 담긴 시선으로 마치 진귀한 보물이라도 만난 듯 아이의 거동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친구는 말했다. "난 애가 저렇게 걷고 뛰고 저 혼자 껑충거리는 거 보고 있으면 난데없이 눈물이 왈칵 난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 그리고 연민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 사실은… 요즘은 시어머니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친 김에 노처녀를 위해 결혼에 대한 '참고할만한 조언'을 해달라 부탁했다. 친구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네 맘 다 안다'는 듯 내 등을 쓱 쓸어내리며 말했다.
    "글쎄… 사랑 하나면 다 되는 줄 알았던 철 모를 때 아니었으면 난 아마 결혼 안하고 혼자 살았지 싶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건, 다시 미혼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거지. 그땐 뭘 몰라도 한참 몰랐어. 처녀 때를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 거릴 때가 많다? 결혼이 아니면 절대 깨우치지 못할 것들이 있어. 결혼은 … 뜨겁고 아프고, 그래서 여기저기 상처가 나지. 그런데, 그 불구덩이에 말이지. 뛰어들만한 가치는 분명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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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김동리는 일생동안 세 번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이 김월계, 두번째 부인이 소설가 손소희, 셋째 부인은 소설가 서영은이었다.
    특히 서영은 작가와의 로맨스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서른 살 차이가 나는 제자와 사랑에 빠져 부인의 묵인 하에 20여년 동안이나 관계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손소희가 암으로 세상을 뜬 뒤에야 서영은은 비로소 김동리의 여자로 세상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어간 결혼생활은 3년 남짓이었고, 나머지 5년은 뇌출혈로 쓰러진 김동리가 숨을 거둘 때까지 서영은이 간병을 하며 지낸 세월이었다. '꽃들은 어디로 갔나'는 그 기간의 자전적 기록이다.
    한 인터뷰에서 서영은 작가는 "사랑을 주제로 쓴 책은 전혀 아니다"고 고백했는데, 실제로 이 책은 20여년간 지속된 불꽃 같은 사랑이 아닌 20년 동안 타오르던 불꽃이 순식간에 꺼져버린 3년간의 결혼생활을 담담하게 담고 있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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