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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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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봄날, 매천 황현을 만나다- 김재근(시인)

  • 기사입력 : 2015-05-0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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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모란이 찬란하게 피었다 지는 오월이다. 크고 화사한 꽃잎이 봄을 물들이면 내 마음도 한껏 피어난다. 그러나 그 화사함도 잠시, 꽃잎이 시들고 계절은 연둣빛 물결로 이어진다. 꽃이 지고 파릇한 새 잎이 다시 돋아나지만 그리운 사람은 가고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어린 자식이나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 걸까. 무덤가에 잔디는 푸르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에 대한 애절함은 하늘만큼이나 아득하다.

    아름다움과 슬픔의 언저리에서 우린 어디쯤 맴도는 걸까. 5월 하늘이 따스함으로 물들 때, 대학시절 핏빛 어린 광주를 떠올리게 된다. 망월동 민주화 묘역에는 아직 연고를 알 수 없어 묘비명도 없는 희생자가 다섯 명이고, 사망자, 구속 구금 등으로 희생된 분들이 5189명이나 된다. 그들의 슬픈 상처를 딛고 민주화가 진전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삶의 곳곳에는 그늘이 많다.

    현 정부 보훈처는 희생자와 그 가족을 추념하고 위로하는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은 되고 제창은 안 된다고 한다. 합창은 합창단이 하는 것이고 제창은 다 같이 크게 노래 부르는 것이다. 가슴 깊은 상처가 있어 노래라도 다 같이 크게 부르면 한이 조금이라도 풀리지 않겠는가? 무엇이 두려운가?

    역사는 진실을 기록할 때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며, 좀 더 나아갈 것이다. 진실을 외면한 나라의 미래는 없다. 아베 총리가 미국 국회에서 어이없게도 사과를 요구하지도 않는 미국에게는 사과를 하고, 핍박을 자행한 아시아인들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한 화법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발언을 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지 않겠는가, 어디 영원한 강대국이 있겠는가.

    최근 이은철 지역사 연구학자(현 광양제철고 재직)가 지은 ‘매천 황현을 만나다’를 읽었다. 조선 말기의 지조 있는 선비의 처신과 요즘 정치 권력자들의 몰염치와 비교가 된다. 권력비리가 터져도 순순히 인정하는 사람은 없고, 세월호에서 새싹 같은 어린 생명들이 어른들을 기다리다 어이없이 죽어도 우리는 이유를 아직 모른다.

    매천 황현은 구한말 2500여 수의 시를 남긴 뛰어난 시인이자 정확하고 냉철한 시각으로 당대를 기록한 역사가이다.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기자 자결로써 절개를 지킨 선비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책을 좋아했고 서른 이전에 과거시험에 합격해 가문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학문에 매진해 스물아홉에 별시 과거시험을 본다. 별시 문과에 1등으로 당당히 합격하고도 당시 과거시험 책임 사관이었던 한장석은 그가 시골출신이란 걸 알고 떨어뜨린다. 서른넷에 부모님의 권유에 생원시에 응시해 1등으로 입격한다. 하지만 부정부패가 극에 달한 구한말 정계를 개탄하여 벼슬길로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매천은 생원이라는 신분보다는 ‘부모님에게 천금 같은 웃음을 드렸다’고 자축시를 쓰며 비굴한 권력이나 출세보다 효가 더 중요함을 실천했다.

    한일합병이 강제로 체결되자(경술국치) 1910년 9월 10일 선생은 4수의 절명시와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살한다. 동생 황원이 이를 알고 달려가 해독약을 구하려 했으나 사양하며 ‘오백년 나라가 망하는 날에 아무도 책임지고 죽는 사람이 없다. 선비는 오로지 당당하게 죽어야 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간다. 훗날 황원 역시 형의 뜻을 이어 자결한다. 봄빛이 푸르다. 권력을 위한 정치가 아닌 진정으로 국민의 아픈 마음과 상처를 보듬는 올바른 정치가 매화 향기처럼 이 땅에 번지기를 소망한다.

    김재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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