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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통영 ‘가구를 만드는 사람들’ 구학성 대표

“가구 팔아 얻은 가장 큰 이윤은 ‘사람과 나눔’이죠”

  • 기사입력 : 2015-05-1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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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시 도산면 관덕리에서 구학성 ‘가구를 만드는 사람들’ 대표가 매장 내 의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통영시 도산면 관덕리의 가구매장 ‘가구를 만드는 사람들’. 지난 5일 입구에 들어서니 1% 나눔이라는 플래카드가 눈에 띈다. 플래카드에는 가구를 구입한 고객의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다. 수십 개가 넘어 보이는 진열된 가구 틈 사이로 구학성(49) 대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구매장은 약 3000㎡로 단일 매장치고는 큰 규모이다. 그 규모만큼이나 구 대표는 가구업계에서 잔뼈가 굵다.

    ▲가구는 내 인생

    오로지 가구만 보고 살아온 구 대표는 가구를 통해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보았다고 했다. 젊은 시절에는 백화점에서 일했다. 당시 일했던 백화점이 붕괴 사고가 났던 삼풍백화점이다. 그는 “가구업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아내의 권유로 백화점을 그만뒀는데 그만둔 시점이 백화점이 붕괴되기 4개월 전이었다. 계속 일했다면 사고로 희생됐을 수도 있었다. 그는 “아내의 권유로 가구업을 시작한 것이 결국 내 목숨을 살린 것인지, 가구업이 천직이라는 하늘의 계시였는지…”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백화점 붕괴 소식을 들은 그는 현장에 달려가 약 한 달간 구조를 위한 자원봉사를 했다.

    구 대표는 “그때 대부분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다”며 “참혹한 상황을 직접 현장에서 보며 인생의 덧없음도 느꼈다”고 했다.

    가구업체에 취직한 그는 판매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다. 당시 사장이 기능 올림픽 출신이었던 점도 큰 도움이 됐다.

    “엄격한 도제식으로 일을 했죠. 인정받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니 배울 것이 늘더군요”

    그는 약 8년간 일을 배운 뒤 경력을 밑받침 삼아 가구점을 차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사실 그에게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지난 1997년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 등 여신으로 대출액만 십수억원을 들여 인천 남동공단에 대형 가구점을 열었다. 그때가 고작 32세 때이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시작했는지…”라며 “자신감 하나로 당시에 겁이 없었다”고 했다. 구 대표는 고급가구점을 열 생각이었으나 당시 외환위기 등 시장상황이 좋지 않아 대중적인 가구로 목표를 수정했다.

    약 6000㎡ 규모의 대형매장에 판매해야 할 가구를 들여놓는 것부터 일이었다. 그는 가구 제조업체를 찾아다니며 “원가를 조금만 낮춰서 납품해주면 20개 팔 것을 100개 이상 팔아주겠다”고 했다. 고객들에게 가구의 원가를 공개하고 가격정찰제를 실시했다. 원가 공개는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지만 박리다매는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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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시 도산면 관덕리에서 구학성 가구를 만드는 사람들 대표가 매장 내 의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성승건 기자/

    ▲인생은 새옹지마

    “당시 가구 가격에는 거품이 많다는 인식이 있었죠. 고객들에게는 호응이 좋았지만 원가를 공개했으니 가구업계에서는 난리가 났죠.”

    가구제작업체 등 거래처도 늘어나기 시작했고 매출도 월등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매장이 번성할수록 경쟁업체의 비난과 시기도 덩달아 늘어났다.

    그는 “규모가 커질수록 신경 써야 할 일도 많아 일 년 중 300일은 뜬눈으로 밤을 새울 정도로 스트레스가 많았다”며 “불면증 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경쟁업체의 시기는 각종 고소·고발로 나타났다. 구 대표는 “가구 공장 사람들에게는 대우를 받았지만 인근 가구업체 사람들에게는 원수 같은 존재였다”고 했다.

    광고 내용, 원가 시비 등 사사건건 고발이 들어왔다. 대부분 고발은 기각으로 끝났지만 결국 매장 규모가 문제가 됐다. 매장위치가 산업공단 내에 있어 약 6000㎡의 면적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매장을 열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뒤늦게 문제가 됐다”며 “결국 산업자원부로부터 철수 통지가 떨어졌다”고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매장을 쪼개서 분산시켜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매출은 반의 반토막으로 떨어졌다. 그는 “당시 나만 바라보던 60여명의 직원들과 100여 곳의 거래처들을 위해서도 버텨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2000년 매장을 모두 처분해야 했고, 각종 대출금과 보증금 등을 정리하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은커녕 파산을 선고받았다.

    ▲“인맥이 재산이다”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실의에 빠졌던 그에게 손을 내민 건 거래처 사람들이다. 한 거래처 관계자가 통영에 빈 매장이 있어 운영해 볼 것을 제안했다. 그는 동업을 통해 다시 가구매장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구 대표는 당시 상황을 “거래처 사람들이 나에게 황금 동아줄을 던져 준 것이다”고 설명했다. 1년 뒤 동업자는 그에게 사업 운영을 아예 맡겼다. 그가 매장운영을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 거래처 사람들의 그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그는 “기존에 거래했던 대부분 가구제작업체들이 가구를 납품해줬다”며 “인맥보다 더 큰 재산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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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학성 가구를 만드는 사람들 대표./성승건 기자/

    ▲1% 나눔, 꾸준한 봉사 실천할 것

    구 대표는 인천 남동공단에 가구점을 할 때 매월 수익금의 1% 나눔기부를 했다. 통영에 정착하면서 직원들과 독거노인 돕기, 연탄 배달 등 봉사활동을 했지만 1% 나눔은 잊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한 사회복지사의 제안에 따라 다시 정기적인 나눔기부를 펼치기로 했다.

    통영에서 가구업을 한 지가 15년. 통영에 뿌리를 내렸다는 그는 향후 20년 이상 이곳에서 계속 가구업을 이어나갈 생각이다. 그는 “젊은 시절 채우기 위해서만 달렸다면 이제는 비우기 위해서 채울 것이다”며 “가구와 함께해온 인생을 통영에서 마무리하며 꾸준한 봉사를 실천할 것이다”고 말했다.

    김용훈 기자 yh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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