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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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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꼬] 벚꽃 뒤 가려진 진짜 얼굴 찾는 진해 여행

근현대 뒤섞여 시간 잃은 곳, 걷기 시작하면 시간 잊는 곳
구도심 따라 근대 시간 속으로
웅천 곳곳 600년 전 역사 속으로

  • 기사입력 : 2015-05-14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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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벚꽃도시로 알려진 진해(鎭海). 4월이면 진해를 하얗게 뒤덮은 벚꽃을 구경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상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진해에는 벚꽃만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진해의 참모습은 벚꽃이 지고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진해는 일제강점기에 대륙 침략과 해군 병참기지로 활용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계획도시가 건설됐지만 근현대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근대건축물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이 그대로 전해 오고 있다.

    구도심은 100년 전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근대건축물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웅천지역에는 조선 최초의 개항지인 제포와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거류지인 왜리, 임진왜란 해전지인 합포와 웅포, 안골포 등 역사의 현장들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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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군항마을역사관

    구도심이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졌다면 웅천지역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물리쳤던 역사적 현장이어서 같은 지역 내 아이러니한 역사가 공존한다.

    마침 한국관광공사는 가정의 달인 5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창원시 진해구를 선정했다. 진해 여행의 테마도 ‘그때 그 시절의 가족 나들이 공간’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진해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구도심= 진해는 1902년 일본이 군사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한 군항도시다. 중앙에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팔거리를 만들어 남쪽에 남원, 북쪽에는 북원로터리를 설치했다. 비록 일본인들에 의해 조성됐지만 한국 최초의 계획도시가 된 셈이다. 당시 일본인들이 팔거리를 만든 것에 대해서는 일본 국기인 욱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과 단순한 도시계획이라는 설이 양분하기도 한다.

    어쨌든 중앙동 중원로터리 일대에는 당시 근현대사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근대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중앙동에는 근대역사 자료를 한데 모아 전시해 진해의 근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진해군항마을 역사관을 건립했다. 중원로터리 부근에는 1955년 만들어진 흑백다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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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다방

    화가 유택렬씨가 칼멘다방으로 개업했다가 1962년 흑백다방으로 개명해 1960~1970년대 진해문화의 중심 역할을 했다. 빨간색의 지붕이 뾰족하게 세워져 있어 뾰족집으로 불리는 중국풍의 3층짜리 8각 누각은 192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생들이 기거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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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뾰족집

    10월 유신탑은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신탑이다. 1972년 박정희 정부가 장기 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선포하며 기념하기 위해 시민의 성금으로 옛 육대 앞 사거리에 9m 높이로 건립했다가 1976년 교통체증 등의 이유로 높이 3.5m 규모로 축소돼 진해우체국 옆 장난감도서관 앞 정원으로 옮겨졌다.

    진해우체국은 1912년 준공됐다. 유럽풍의 흰 단층 목조건물로 2000년까지 우체국으로 사용했고 문화재 제291호로 등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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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우체국
    일본인 상가들이 밀집했던 장옥(長屋)거리는 1910년대 지어졌다. 지붕을 길게 잇고 아래 칸칸이 벽을 두고 사용했다. 주로 1층은 상가, 2층은 가정집으로 사용하며 전형적인 일본풍 건물이다.

    1912년 일제해군병원장의 사택은 지금은 ‘선학’이라는 곰탕집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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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 진해구 중앙동 장옥거리. 일본식 건물인 장옥은 러일 전쟁 직후 1910년대 진해를 군사도시로 건설할 때 지어졌다. 주로 1층은 상가, 2층은 가정집으로 이용됐다.


    이승만 대통령과 장제스 대만 총통이 회담 후 식사를 했다는 영해루(현 원해루)도 남아 있다. 화물수송을 담당했던 진해역은 등록문화재 제192호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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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해루




    ◆웅천= 진해의 원중심지였던 웅천지역은 1407년(태종 7년) 제포(현 제덕)를 일본에게 개항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항지로 이곳에는 일본인 마을도 형성돼 있기도 했다.

    웅천읍성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곳이지만 웅천왜성은 임진왜란 때 왜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군의 방어를 위해 성을 쌓은 곳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독립운동가이자 기독교계의 큰 별인 주기철 목사 기념관과 호주 최초의 선교사 데이비스가 1906년에 세운 웅천교회도 있다.

    김달진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을 비롯해 조선전기에 분청사기와 백자 등을 제작했던 가마터인 웅천 도요지 전시관도 꼭 둘러볼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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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원로터리 이충무공 동상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 바다의 도시답게 해군과 해군사관학교가 있는 진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북원로터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충무공 장군 동상이, 남원로터리에는 충무공의 진중음을 김구 선생의 친필로 적은 시비가 있다. 해군사관학교 내에는 박물관과 거북선이 전시돼 있다. 거북선은 지난 1980년 실물 크기로 복원해 해군사관학교 귀빈부두 해상에 전시하고 있다.

    왜군이 만든 유적인 웅천왜성과 안골왜성은 일본식 축성기술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충무공의 해전지도 세 군데나 있다. 임진왜란 당시 풍호동 행암 앞바다에서 벌어진 합포해전(1592)은 이순신 장군이 왜선 5척을 모두 침몰시킨 것으로 창원에서 벌어진 최초의 해전이다. 웅포해전(1593년)은 웅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조선수군이 7차례나 공격해 승리했다. 안골포해전(1592년)은 안골포에 주둔하던 일본 정예 수군 함대 42척을 공격해 승리했다. 풍호동 수치마을 앞바다에 합포해전 안내비가, 웅천동 사도앞바다에 웅포해전 안내비, 안골동 앞바다에 안골포해전 안내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진해의 그곳, 그것 아시나요?

    -제황산 37·38계단= 제왕산이던 원래 명칭을 일본인들이 제황산으로 바꾸고 이곳에 공원을 조성했다. 산 정상에는 일본이 1905년 러일전쟁 승리 기념으로 군함 모양을 딴 기념탑을 세웠다가 해방 이후 일제 잔재라며 모두 없앴다. 하지만 37·38계단은 단순한 계단쯤으로 여기고 철거하지 않았다. 그러나 37계단은 명치 37년(1904년), 38계단은 명치 38년(1905년)에 있었던 러일전쟁의 기간을 상징하는 숨은 뜻이 있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승전기념탑으로 올라가는 곳에 37개, 38개 돌계단을 만든 것이다. 철거 과정에서 계단에 담겨진 숨은 내용을 몰라 살아남았던 이 계단은 최근 보수과정에서도 의미를 모른 채 공사하면서 한 계단을 더 올려 현재 37개, 39개 계단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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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황산 37·38계단

    -이충무공 동상= 진해 북원로터리에 세워진 이충무공 동상은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이다. 6·25전쟁 당시 해군 창설 기념일에 국난극복의 정신적인 지표인 이순신 장군의 동상 설립이 거론됐다. 이어 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성금 모금과 함께 당대 최고의 조각가인 윤효중씨가 건립을 맡게 됐다. 윤효중씨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사료 등을 바탕으로 얼굴상을 찾아내고 이후 품평회 등을 거쳐 해군공창에서 통주물로 동상을 제작했다. 당시로는 거금인 4541만8000원의 경비를 들여 1952년 4월 13일(임진왜란 발발일)에 이승만 대통령 등 국내외 귀빈들이 참석해 성대하게 제막식을 가졌다. 동상 아래 표지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지만 이후 독재자로 낙인되면서 동상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지금도 자세히 보면 긁어낸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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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로터리 김구 선생 친필 시비



    -김구 선생 친필 시비= 남원로터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시비가 세워져 있다. 김구 선생이 가장 존경하던 이순신 장군의 시 진중음(陣中吟)의 구절 가운데 ‘誓海魚龍動(서해어룡동)/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풀과 나무가 알아준다’가 새겨져 있다. 김구 선생이 만주에서 귀국 후 백성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삼남지방 순례에 나섰는데 첫 번째 방문지가 진해였다. 김구 선생이 진해를 떠나기 전 지역 유지들이 글을 요구했고, 서울로 올라간 김구 선생이 글을 써서 내려 보내 시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정적이던 이승만이 대통령이 돼 진해를 방문하게 되자 뒤탈을 우려한 해군 간부와 공무원이 진해역 창고로 옮겼고, 이 과정에서 시비 왼쪽 모퉁이가 깨졌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 시비를 남원로터리로 옮겨오게 되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대통령 친필= 진해에는 해군사관학교와 대통령 별장이 있어 대통령들이 자주 다녀간 곳이다. 그런 여파로 진해에는 역대 대통령이 남긴 친필이 유독 많다. 제황산공원과 진해공설운동장 등 곳곳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 남아 있다.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유독 진해별장을 좋아해 여기서 생일 파티 등 행사를 많이 했고 자연스럽게 친필도 남기게 됐다.(도움=홍성철 진해문화원 부원장·진해근대문화유산보전회 ‘진해 이바구’)

    글= 이현근 기자·사진=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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