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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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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봄볕, 언제 들까- 정영선(시인)

  • 기사입력 : 2015-06-1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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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여름 날씨가 땡볕을 퍼붓는다. 이 여름에 꽁꽁 언 가슴을 녹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봄을 향해 지친 발목 절뚝이며 하염없이 생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

    지난겨울, 내가 속해 있는 단체에서 불우이웃을 방문한 적이 있다. 좁은 골목을 돌아 낮은 지붕들 사이, 삐거덕거리는 녹슨 대문 들어서니 눈어림으로 방 한 개에 부엌 한 개 달린 셋방이 서너 가구쯤 모여 사는 집이다. 빠끔히 열린 방 안에는 칠순을 넘긴 할머니가 큰 고무대야에 마늘을 쌓아놓고 까고 있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차디찬 방에서 물 묻은 시린 손으로 쭈그리고 앉아 일하는 할머니의 야윈 등이 마른 나뭇잎 같았다. 마늘을 까는 손놀림이 예사롭지가 않아 말을 붙였더니 몇 년째 마늘을 까왔다며 마늘을 까야 입에 풀칠이라도 한단다. 이 일도 계속 있는 것이 아니라서 시나브로 폐지를 모아 팔아야 생계를 유지한단다. 손자까지 맡아서 키우려니 학용품값도 만만치가 않다며 긴 한숨을 뱉는다. 허리와 무릎도 아프고 고혈압도 있지만 돈이 없어서 병원에는 갈 엄두도 못 내는데 혹시 몸이 더 아플까 그게 늘 걱정이란다. 옆방에 사는 할머니는 물론 그 주변 노인들 모두가 형편이 거의 같아 보였다. 어둠의 그림자와 습한 공기가 짙게 드리워져있는, 의지하고 마음 둘 곳 없어 외로움과 한숨뿐인 그곳엔 봄도 여름도 오지 않았다. 신문과 방송에서나 봄직한 그토록 어려운 환경에서 빈곤을 앓는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손이 닿는 곳에 실제 있다는 사실이 놀라움이었고 충격이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손잡아 줄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우리의 눈의 각도를 돌려 낮은 곳을 보아낼 줄 아는 심안으로 작은 신음소리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

    나는 경로대학에서 십년 남짓 교사로 봉사하며 어르신들을 섬기고 있다. 그분들은 경로대학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말끔히 차려입고 와서 노래하고 율동하며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 한글과 요가, 스포츠댄스, 탁구, 뜨개질 등 본인이 배우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배우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렇게 늘그막에도 삶을 아름답게 향유하며 살아가야 함이 마땅하거늘 그분들을 볼 때마다 겨울 속에 신음하며 냉방에서 쭈그리고 앉아 마늘만 까는 그 할머니가 문득문득 생각난다. 하루하루의 생계가 급급해 작은 마음의 여유마저 누리지 못하고 아픈 몸을 이끌며 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할머니의 삶에 화창한 봄볕은 언제 들까.

    가끔 매스컴에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금할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담긴 마음을 보게 되는데 남을 돕는 일은 받는 사람에게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큰 힘이 될 수 있다.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나의 말 한 마디가 위로가 되고 내가 내민 작은 사랑과 정성이 보탬이 된다면 기꺼이 그들의 손을 잡아 줘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가슴앓이 하는 사람들이 많을 줄 안다. 그들의 언 가슴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말이라도 사랑으로 건넬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영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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