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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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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6) 고향 풍경 담은 그림과 진주남강 둑방길

사라진 추억 속 그 길, 남겨진 그 길 속 추억

  • 기사입력 : 2015-07-16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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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는 그랬습니다. 길은 지겨움이자 막막함이었습니다.
     
    어딜 가든 걸어야 했으니까요.
     
    길은 늘 멀었고, 걷는 건 고통이었지요.

    차가 귀했던 그 시절, 아이에게 두 다리는 유일한 이동수단이었습니다. 40~50분 거리에 있는 학교를 매일같이 걸어다녀야 했으니 그 힘겨움은 오죽했을까요.
     
    경운기 한 대 지나가려면 길 걷던 아이가 옆으로 비켜서야 했던 마을길.
     
    그 길은 세상과 소통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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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순근 作 ‘푸르른 오후’
    길이 시작되는 마을 들머리엔 정자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곳은 마을사람들로 늘 북적였어요. 놀 곳이 마땅치 않았던 아이들, 시원한 그늘이 필요했던 어른들이 길을 따라 모여들었거든요.

    아이의 집 앞엔 대나무숲이 있었습니다. 숲을 지나면 드넓은 백사장과 남강이 펼쳐졌어요. 아이는 대나무로 만든 낚싯대를 들고 팬티 바람으로 남강으로 뛰어듭니다. 강 건너편까지 수영을 하기도 하고 물고기를 잡아 구워도 먹습니다.

    대나무숲 사이엔 길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좁다란 샛길이 있었는데요. 아이는 번듯한 마을길을 두고 이 길로 학교를 오갔습니다. 어른들의 눈이 닿지 않는 아이들만의 길. 종종 농땡이를 쳐도 먹고살기 바빴던 어른들은 알 길이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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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남강 둑방길을 우순근 화가와 강지현 기자가 걷고 있다. 화가는 남강을 따라 길게 난 둑방길을 걸으며 옛 추억을 떠올린다고 말한다.
    세월이 흘러 마을이 있던 자리엔 공단이 들어섰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길도 사라졌습니다.

    화가가 된 아이는 사라져버린 고향길을 한지 위에 옮깁니다. 어린시절 내딛던 길은 고통이었지만, 성인이 되어 떠올리는 길은 추억입니다.

    지난 2001년부터 ‘시간여행’을 테마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화가 우순근씨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작품 한쪽엔 늘 길이 있습니다. 어린시절 동네 정자나무에서 시작됐던 그 길이 때론 사선으로, 때론 꼬부랑길로, 때론 건물 안 계단으로 등장합니다.

    “작품의 창작 모티프는 ‘추억’입니다. 나를 찾아가는 시간여행이지요.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길이 제 작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의 출발점이 길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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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르른 오후’라는 작가의 그림은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습니다. 그곳엔 슬레이트를 댄 빨간 양철지붕, 널찍한 마루, 까만 부엌문이 있는 집과 아스라이 펼쳐진 싱그러운 대나무밭이 있습니다. 돌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담벼락 사이엔 나무를 덧대 만든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열어젖히면 남강 백사장으로 이어지는 길이 소박하게 펼쳐집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마을 풍경이 작가의 마음속에 남아 그림으로 녹아든 것이지요.

    화폭에서 느껴지는 편안함 때문일까요. 그림을 보고 있으면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지는데요. 길과 나무, 집과 담벼락 모두가 정겹게 다가옵니다. 하얀 여백은 상상의 공간이 되어 보는 이를 아름다운 추억 속으로 안내합니다.

    한지 속에 스며든 색채는 마치 가루를 곱게 뿌려 놓은 듯한 느낌이 드는데요. 그림의 주재료인 토분과 분채, 석채가 주는 특유의 질감 때문입니다. 자연스러운 질감의 재료를 얻기 위해 작가는 고구려 고분 벽화를 연구했다고 하는군요.

    정제시킨 토분을 아교와 배합한 후 장지에 두세 번 얇게 펴 바르는 것이 작업의 시작입니다. 그 위에 흰색 분채물감으로 바탕을 깐 후 색색의 분채물감을 드리핑 기법으로 한지 위에 뿌려 큰 덩어리들을 표현해요. 세부적인 작업은 붓으로 드로잉하고, 석채로는 포인트를 줍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은 그만의 방식인데요. 간결하고 소박해 보이는 그림이지만 그 안엔 작가의 열정과 노력이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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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입구에 있던 정자나무. 지금은 공장 안에 있다.

    우순근 작가와 함께 기억을 더듬으며 그림 속 추억의 길을 찾아가 봅니다.

    공장으로 들어찬 진주 상평동 지역인데요. 1970년대 도시계획으로 상평공단이 들어서며 급격한 변화를 겪은 곳입니다. 한일병원을 기점으로 위쪽은 큰들로 불렸고, 작가는 아래쪽 아랫들에 살았죠.

    그가 싫증나도록 걸어다녔던 길, 그땐 너무 지겨워 생각도 하기 싫었던 그 길이 지금은 흔적조차 희미해졌더군요. 4차선 도로가 놓이면서 마을길은 공장 담벼락과 인도의 일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정자나무는 공장 안에 갇혀버렸고요. 무성하던 강가의 대나무는 모조리 잘려나가 그곳엔 제방이 쌓였고, 자연스레 백사장도 사라졌습니다. 비닐하우스가 있던 드넓은 논밭은 공장으로 변했고요.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아스팔트가 생기더니 그 길로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어요. 대나무밭이 있던 자리엔 둑이 들어섰고요. 그건 중학교 다닐 무렵이었으니까 아마 1985년쯤일 거예요. 공단이 들어서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짐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먹고살아야 했으니까요. 결국 젊은 사람들은 다 떠나고 어르신들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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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길이 있던 자리는 인도와 공장의 담이 차지했다.

    지난 30여 년의 세월 동안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사라졌습니다. 논밭이 있던 자리엔 아파트와 공장이 들어섰고, 최근엔 강 건너편에 혁신도시가 완공됐습니다. 강을 가로지르는 상평교와 김시민대교 위로는 쉴 새 없이 차가 지나다닙니다.

    변하지 않은 건 단 하나, 백사장을 잃고도 묵묵히 흐르는 남강만은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맞은편에 있는 나지막한 산과 함께 말이죠.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남강 곁에 나란히 놓인 둑방길을 걸으며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겁니다. 옛 마을길을 잃은 대신 둑방길을 얻었다고나 할까요. 길게 뻗은 둑방길을 따라 간간이 자전거가 달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부모님 뵈러 진주에 오면 가끔 강둑에 서서 어린시절을 생각합니다. 길을 따라 12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마을이었지요. 학교에 갈 때도 병원에 갈 때도 동네사람들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어요. 시골길이 그렇듯 갈래 없는 외길이었으니까요. 맑은 날엔 흙먼지가 폴폴 날리고 비가 오면 질척거리던 황톳길이었는데…. ‘어데 가노?’ 길을 오가며 들었던 그 목소리들이 그립습니다.”

    둑방길을 걸으며 작가는 말합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 추억의 길 하나쯤은 품고 있을 거라고. 그러니 현실의 길이 힘겨워 벗어나고 싶을 땐 마음 속에 묻어둔 추억의 길을 떠올려보라고요. 추억 속의 길은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아름다우니까요.

    글= 강지현 기자 pressk@knnews.co.kr

    사진= 성승건 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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