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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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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11) 정지상/송인(送人)

  • 기사입력 : 2015-07-17 14: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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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 그 아이를 본 것은 1997년 어느 겨울날이었다. 온나라를 극심한 혼란 속에 밀어넣었던 IMF 금융위기로 더욱 각박하게만 느껴지던 그해 겨울. 나는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다.

    나는 아침 나절부터 들떠있었다. 그 아이가 우리집에 온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하고,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냅다 집으로 뛰어들었던 그날 오후.

    책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쌩하니 쫓아들어가 방 문부터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숨이 멎을 듯 따뜻하고 부드러운 대기로 가득한 방 한가운데, 그 아이가 하얀 포대기에 싸여 잠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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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열이 올라 새빨갛고, 물에서 나온 듯 쭈글쭈글하고, 그런 중에도 볼록한 두 볼에 보송보송 잔털이 돋아있던 아이의 얼굴.

    아이의 엄마는 내게 말했다. 아기 만져보고 싶지? 손 깨끗이 씻고 와.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가 비누로 뽀득뽀득 손을 씻은 나는 차가운 손을 이불 밑에 밀어넣고 조바심 치며 기다렸다. 아이에게서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한 채.

    두 손이 어느정도 미지근하게 덥혀진 후 숨을 죽이고 아이의 볼과 이마를 만져봤다. 막 녹아내리는 눈송이를 만지듯 아주 조심스레.

    어른 팔뚝 크기도 안 되어보이는 아이는 손길이 닿기 무섭게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비틀었고, 나는 탄성을 질렀다. 고모! 아기가 움직여요!

    삼십대 초반, 이제 막 해산한 여리여리한 몸의, 눈부시게 젊었던 고모. 고모는 어린 조카를 향해 싱긋 웃어보인 뒤 토닥토닥 아이의 가슴을 두드렸다.

    아이는 다시 잠이 들었고, 해가 질 무렵까지 나는 그 곁을 떠나지 못했다. 고소한 아기 살 냄새, 몽롱한 젖 냄새, 향긋한 베이비 파우더 냄새를 맡으며 아기 옆에 엎드려 숙제도 하고 책도 읽고 만화영화도 봤다. 그게 고종사촌 동생 B와의 첫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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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띠동갑이었다. 나는 1985년 을축(乙丑)생, B는 1997년 정축(丁丑)생.

    나는 장남인 아버지의 첫 아이, B는 막내 딸인 고모의 막내 아이였고, 공교롭게도 우리 둘은 정확하게 12간지를 한바퀴 돌아 사촌지간의 인연을 맺었다.

    B는 무럭무럭 자랐다. 아기는 마치 경극 배우처럼 수십번 얼굴을 바꾸며 자랐는데, 처음봤던 새빨갛고 못 생긴 가면을 벗어던진 B는 달덩이같이 희고 사지가 곧은 아름다운 사내아이로 자라났다.

    대체로 싸하게 냉기가 돌면서 건조한 성격의 우리집 사람들의 심성을 닮지 않아, B는 조용하고 침착한 가운데서도 정이 넘치고 애교가 많았다.

    그러나 B의 유년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뒤를 봐줄 연줄도, 든든한 재력도 없던 고모부는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박사학위를 따야했고, 인정사정 없는 서울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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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모는 인천의 여고 교사로, 고모부는 서울의 대학 연구소에 몸담고 있던 시절, B는 외로운 아이였다.

    B는 오후 내내 고모가 벗어놓은, 목이 늘어나고 김칫국이 묻은 티셔츠를 부둥켜안고 엄마가 남기고 간 채취를 맡아가며 혼자 학습지를 풀고 만화영화를 보고 간식을 먹었다.

    고모는 퇴근을 한 뒤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하고 어린 B를 가슴에 꼭 안고 한참을 다독이며 품어주어야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B가 울고 칭얼대며 힘들어했기 때문이었다.

    충일하고 충실하고 충분한 온기, 사랑, 그리고 믿음. 어리고 외로웠던 B는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것 같았다.

    가끔 내가 고모댁에 가면 B는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누나, 언제 갈거야? 오래 있다가 갈 거지? 열밤 넘게 자고 갈거지?'라며 다짐을 받곤했다.

    그러다 다음날 짐을 꾸리기 시작하면 불안하게 내 등 뒤를 왔다갔다 하다, 작별인사를 하고 문을 나설 땐 어김없이 눈물을 뿌리며 '다음 주에 또 올거지?'라고 물었다.

    그러면 나도 덩달아 맘이 약해져 B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응. 누나 다음 주에 또 올게. 그땐 정말 열밤 자고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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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천사같이 순하고 착했던 B였건만, 중학교에 올라간 B는 이전에는 겪어본 적 없던 혹독한 사춘기를 맞았다.

    곧잘하던 공부를 하기 싫어했고, 재능을 보이던 바둑과 피아노를 멀리했으며, 연락을 끊고 홀연히 사라졌다 나타나기도 하면서 고모부부의 애를 태우기 일쑤였다.

    가끔 고모가 내게 '요즘 B를 보면 너무 위태위태하다'는 푸념을 했지만, 사실 나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나는 이제 막 직장을 잡은 사회초년생이었고, 내 앞에 당면한 문제를 풀기에도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상황이었다.

    위로랍시고 이런 시답잖은 말들을 하기는 했었다.

    고모, 눈물 젖은 빵을 안 먹어보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 있잖아. 그거 진작에 바뀐 거 몰라? 사춘기 남자애 안 키워보고서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이렇게.

    그리고 바로 그해, 그러니까 2012년 겨울 어느 날. 난데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불길한 전화는 12시가 넘은 한밤 중, 칠흑같은 어둠을 찢으며 걸려왔다. 곤히 잠들었던 가족들 모두가 깨어났고,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유경아! 어떡해… B가 잘못됐다.

    B가 잘못되다니. 나는 언뜻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사실을 온전히 또 완벽히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해 겨울, 이듬해 초봄까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2012년 겨울 어느 날. B는 우리 곁을 떠났다.

    자전거를 타고 급경사를 내려오던 B는 반대편 차로에서 과속으로 달려오던 승용차에 그대로 부딪쳤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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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들 모두 장례식장으로 올려보낸 뒤 발인 전날 회사에 연차를 내고 홀로 서울로 올라갔던 기억. 옆자리 승객에게 들키지 않으려 어둔 차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

    내장이 덜덜 떨릴 정도로 온몸이 긴장했던 기억. 나는 과연 B의 영정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눈은 어디에 둬야할지. 쓰잘데없는 공상을 잘도 즐기는 나였지만, 그렇게 끔찍한 상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괜한 기우였다. 영안실에 들어서자마자, 저절로 무릎이 굽어지며 뱃속 깊은 곳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소리도 질렀다. 눈물과 콧물이 턱과 목에 줄줄 흘러내렸다.

    내 안 어디에 이런 모습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질펀하게 울부짖었다. 눈물이 말라버린 고모는 내 등을 쓸며 B의 영정에 대고 말했다. B야. B야. 네가 그리 좋아하던 큰 누나 왔다. 누나가 왔다.


    이후 고모부부는 B와 함께 살던 집을 팔고 인천의 신도시로 거처를 옮겼다. B의 사진 몇장과 피아노만 남기고 B의 물건들도 모두 처분해버렸다. B가 떠난 고모부부의 둥지는 사계절 내내 외풍이 들이치는 방처럼 쓸쓸했다.

    고모는 B와 함께 보내던 오후 시간을 요가강습으로, 고모부는 테니스 동호회와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며 보낸다. 방학 땐 멀리 여행을 떠나고 휴일엔 함께 등산을 하고 음악을 들으러 간다.

    고모와 고모부는 현명한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스스로를 불행해 빠뜨리는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 B는 떠났지만 부부에겐 합심해서 키워야 할 큰 딸이 남아있었다. 내 보기에, 두 사람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욱 충실하게 또 진실되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아이가 아주 잠깐 우리에게 왔다 갔다는 사실, 그것은 절대 잊을 수 없다는 것을. 거리에서 B와 비슷한 또래의 사내아이들과 마주칠 때, 그 아이들의 얼굴에서 폭죽처럼 터져나오는 함박웃음을 바라볼 때, 고모의 심장은 덜컹대며 바닥으로 떨어져내린다. 나는 그 소리를 아주 멀리서도 들을 수 있다.

    B를 잃고 고모는 말했다. 나는 사실 B가 너무 예뻤다. 내 속에서 어떻게 그런 아이가 나왔는지, 자다가도 일어나 감탄할 정도였다. 그런데 숨겼다. 그 마음을. 두려웠거든. 어떤 나쁜 기운이 우리를 시샘할까봐. 좋은 티 덜 내고 꼭꼭 숨기고 살았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맘껏 예뻐할 걸. 더 안아주고 더 아끼고 더 사랑할 걸. 그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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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고모댁에 갔을 때, 고모는 드라이브를 나가자며 인천 송도 앞바다로 차를 몰았다. 우리는 도로가에 차를 세워놓고 밖으로 나와 한참동안 출렁이는 물을 바라봤다. 저 멀리 수평선 어름에 뿌옇게 해무가 끼어있었고 바람은 잔잔했지만 파고는 높았다.

    그 곳은 지난날 어린 B와 고모가 고모부가 퇴근하길 기다리며 갈매기 때에게 먹이를 주고 바닷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도 타고, 손을 잡고 천천히 산책을 즐기던 곳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 고모가 홀로 담금질 해온 슬픔을 엿보았다. 아들의 생일이 아닌 기일을 챙겨야 하는 어미의 심정을. 어김없이 돌아오는 눈부신 계절마다 그 망망대해 위에 거듭 흩뿌렸을 그녀의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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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개인 긴 강둑에 풀빛 더욱 새로운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남포에는 이별의 슬픈 노래 그칠 날 없구나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물 언제나 마르랴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의 눈물 물결 위에 뿌리는데

    - 정지상/'송인(送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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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내 나이에 B를 낳았던 고모. 어린 조카를 향해 싱긋 웃어보이던 그녀의 포근하고 아름답던 빛. 그러나 지금 저 먼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고모에게서는 전혀 다른 색깔의 빛이 뿜어져나오고 있다. 그리고 겨울에 왔다 겨울에 떠난 나의 사촌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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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생(生)에서 그 아이와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면, 나머지 인연은 어느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꼭 다시 이어지기를 빈다는 것도. 그땐 B를 내 품 안에 꼭 안고 이렇게 말할 작정이다.

    B. 울지마. 이번엔 스무밤 자고 갈게.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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