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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붙어먹는 기쁨을 아는 몸들이여!- 오인태(시인·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15-07-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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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색이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의 명함을 달고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너나없이 나서서 가하는 몰매를 거들 생각은 없었다. ‘신경숙 표절 추문’ 말이다.

    처음엔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던 작가가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표절시비를 ‘합리적 지적’으로 인정했다. “두 작품의 유사성을 비교하기가 아주 어렵다. 문장 자체나 앞뒤 맥락을 고려해 굳이 따진다면 오히려 신경숙 작가의 음악과 결부된 묘사가 더 비교 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며 작가를 옹호하던 창비도 “한국문학과 함께 동고동락해온 출판사로서 이번 사태에 대해 신중하게 판단하지 못한 점은 어떤 사과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입장을 바꾸면서 사태가 일단락되고 자정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했다. 그런데 며칠 전 메일로 보내온 다산포럼의 글은 신경숙 추문이 사람의 문제라기보다 구조의 문제임을 환기시켰다.

    ‘문학에서 표절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문학평론가 윤 아무개 교수는 T.S.엘리엇의 “나쁜 시인은 훔친 것을 훼손하고 좋은 시인은 더 낫거나 최소한 다른 무엇으로 만든다. 좋은 시인은 훔친 것을 원래와는 판이한 자기만의 전체적인 감정 속에 녹여내지만 나쁜 시인은 버성기게 엮어놓는다”는 말을 빌려 “작가가 미시마의 작품을 읽었든 아니든, 그 사실을 기억하든 못하든, ‘우국’의 일부 문장이 ‘전설’에서 전혀 다른 감정에 결합되어 빛나고 있다면 작가는 할 일을 한 것이다. 작품과 작가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전설’에서 신경숙은 자신이 엘리엇이 말하는 ‘좋은 시인’임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며 신경숙을 ‘좋은 시인’으로 변호하고 있었다. 창비에서 비평서 두 권을 낸 윤 교수의 이력이 눈길을 끌었다. 아하, 이분도 ‘창비맨’이구나!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과 신경숙의 ‘전설’에서 문제가 됐던 부분을 다시 읽어보자.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워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됐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했다.”(미시마 유키오의 ‘우국’ 일부)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됐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신경숙의 ‘전설’ 일부)

    어떤가? 윤 교수의 말대로 “‘우국’의 일부 문장이 ‘전설’에서 전혀 다른 감정에 결합되어 빛나고” 있는가, ‘술이부작’이나 ‘텍스트 상호성’으로 이해할 만한 정도의 ‘기억의 잔영’일 뿐인가?

    정작 지금 내가 비통해하는 것은 표절논란 그 자체가 아니라 이번 신경숙 추문에서도 여실히 보여준, 소위 진보진영의 인식과 대응수준이다. 보수와 다를 게 없다. 아, ‘벌써’ 붙어먹는 ‘기쁨을 아는 몸’들이여!

    오인태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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