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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융성의 중심축은 문화예술인이다- 유진규(마임이스트)

  • 기사입력 : 2015-07-2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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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가 ‘문화융성’ 정책을 시행해 오고 있다.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로서 피부로 느끼는 것은 ‘예술활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기금들이 기초예술과 순수예술 작업보다는 지역민, 지역사회, 나아가 국민과 어떻게 함께 나누고 있는가가 주요 관심사이면서 기준의 척도가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뒷전으로 미루고 국민문화 융성에 앞장서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정책이 파도처럼 밀려오니까 예술가들이 거기에 휩쓸리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술의 존재가 예술가 개인의 창의성이라고 볼 때 보편적 정서에 부합하는 것은 창조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다.

    문화가 ‘땅’이라면 예술은 거기에 피는 ‘꽃’이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꽃을 재배하면 예술은 제품이 되고 만다.

    몇 달 전 한 무명 연주가가 ‘파국’이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청년사회적기업가로 선정됐으며 다양한 공연활동도 해오고 있었다. 또 어려운 가운데서도 저소득층 어린이를 위한 재능기부까지 하면서 젊음을 공연예술에 던졌다. 하지만 그가 최종 선택한 것은 죽음이었다.

    지금 이 땅에는 그러한 잠재적 자살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문화예술가들이 겪는 빈곤은 도를 넘어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 있다. 국내 문화예술인 67%가 월 100만원 이하의 수입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26.2%는 한 달 동안 아예 수입이 없다고 한다.

    사실 예술가들도 하나의 인간이며 자신의 생명에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복지정책이나 지원금에 기대만 하는 것은 본질과 자존심에 맞지 않다. 허나 분명한 사실은 예술은 ‘예술가 내면의 표현’이고 그것의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 우리나라 헌법 제22조에는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쓰여 있다. 예술가는 ‘복지’가 아니라 ‘자유’를 먹고 산다. 그런데 지금 많은 예술가들이 ‘빵’을 위해서 자본과 정치 앞에서 눈치를 보면서 스스로 검열하는 모습은 배고픔에 비굴함만 더하게 할 뿐이다.

    지난해에는 ‘세월호’가, 올해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이 나라를 태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국내 예술계도 맥없이 거기에 휩쓸렸음은 물론이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필자는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기억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노동하러 나가고 들어올 때 입구에서 연주를 하던 음악인들을. 그 모습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동족들을 위한 음악이기도 했다.

    가공인지 여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도 예술가들은 죽음을 아름답게 연주하며 마감하게 해줬다고 한다. 예술행위는 그런 것이다. 괴질이 돌든, 전쟁이 나든 예술인들은 그 아픔과 슬픔과 분노를 아름답게 해 주었다. 그런데 최근 이 나라의 예술과 예술인들은 정치와 자본 앞에서 말을 잘 듣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 같아 적잖이 씁쓸하다. 자율적인 예술가들의 행동은 허가되지 않고 있으며, 예술가 스스로도 무릎을 조아리고 있는 듯하다.

    “국민 모두가 문화가 있는 삶을 누리고 사회 곳곳에 문화의 가치가 스며들게 해서 국민이 행복한 문화환경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문화철학 아래 최근에 예술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변방연극제’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예술은 권력과 자본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말과 함께 권력과 자본에 종속되지 않는 예술의 자율성을 위해 ‘풀뿌리 모금’으로 축제를 치르고 있는, 지금 벌어지는 예술가들의 행동에 꺼지지 않는 불의 희망을 바라본다.

    유진규 (마임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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