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8일 (목)
전체메뉴

[작가칼럼] 굴절된 삶- 박형권(시인)

  • 기사입력 : 2015-08-14 07:00:00
  •   
  • 메인이미지

    개미들이 위태로운 쑥대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잠깐 동안에 쑥대의 우듬지가 개미로 초만원이 됐다. 개미들이 의지한 쑥대는 심각하게 기울어 있었다. 물은 엄청나게 불어 있었고 개미들 중 상당 부분이 서로 엉켜 있었지만 뚝 떨어져 물에 휩쓸려갔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인지 EBS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가게에 담배 사러 갔다가 그 장면을 보았다. 개미들은 말할 수 없으므로 살려달라고 외치지는 않았다. 또 한 덩이가 떨어져 나갔다. 내 귀에 살려달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려왔다. 개미들은 자연의 변화에 속수무책이었다. 별로 즐겁지 못한 이야기다.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다.

    마산은 해안선의 굴곡이 아름다운 도시였다. 해안선은 땅과 바다가 오랜 기간 서로 부대끼다가 양보하고 타협한 결과물이다. 더 이상 침범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한다는 대자연의 외교문서다. 이 정도는 받아들이고 이 정도는 밀어내겠다는 선언이며 약속이다. 그것은 꽤 오래 지켜졌다. 안정된 해안선의 굴곡에 기대어 물고기와 새와 길짐승과 사람이 둥지를 만들어 들어가서 살았다. 굴곡이 있다는 것은 기댈 곳이 있다는 것이다. 소위 비빌 언덕이 있다는 것이다. 해안선의 아름다움은 깃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삶도 선물했다. 창동 차 없는 거리도 생겨났고 아구찜 집들도 들어섰고 어시장 청과물시장 소주공장 맥주공장 간장공장 섬유공장…. 홍콩빠도 생겨났다. 굴곡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었고 생활이었다. 해안선의 굴곡은 사람들의 인생에게도 여러 가지 굴곡을 제공했다. 인생은 굴곡이 있어서 흥미로운 것이 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바다와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렸다. 사람들이 해안선을 침범해 매립하기 시작했다. 해안선을 침범하는 것이 바다에 대한 인간의 도전의식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것은 도전이기보다 도발에 가까웠다. 앞바다에 기대어 살던 것들이 먼 바다로 쫓겨났다. 마산 앞바다 하면 상징처럼 떠오르는 풍경이 있었다. 멸치잡이 배였다. 마산 경제의 큰 역할을 맡았던 멸치어장도 한 발 두 발 먼 바다로 밀려나다가 마산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마산 앞바다는 새로 생기는 것보다 사라지는 것이 많은 바다가 되어버렸다. 파래 미역 톳나물 잘피가 사라졌고 멸치와 전어와 미더덕이 그 뒤를 따랐다. 바다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기존의 해안선이 있던 곳까지 해일로 응답했다. 바다와의 밀월시대는 끝이 났다. 굴곡 있는 삶은 즉결처분됐고 굴절된 삶만 오롯이 남았다. 굴절은 굴곡과 사촌쯤 되는 것 같지만 전혀 별종의 괴물이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각도로 튀어나가 버리는 것이 굴절이다. 이제 마산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당장 날개를 달고 마산만 주위를 조감해보라. 둥그스름하고 부드러웠던 해안선은 사라지고 칼로 자른 듯한 직선만이 바다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굴곡은 사라지고 굴절이 우리를 서늘하게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굴절된 인생에 공모해온 것이다.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은 이럴 것이다. 대체 어느 놈의 대가리에서 이따위 게 나온 거야?

    아직은 바다가 굴절된 삶에서 벗어나라고 기다리고 있다. 인내에 대해서는 바다를 따를 자가 지상에는 없다. 그러나 바다가 언제까지 참고 있을까. 자연의 재앙은 죄 지은 자나 죄 짓지 않은 자를 가리지 않는다. 무차별적이다. 내가 TV 속의 개미가 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박형권 (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