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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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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7) ‘우해이어보’의 마산 광암항 방파제길

200년을 사이에 두고 두 시인이 ‘시어’를 낚았던 바닷길

  • 기사입력 : 2015-08-20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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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광암항 주변 방파제를 따라 걷다 보면 시원한 바닷바람과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성승건 기자/
    마산에서 나고 자랐으면 ‘볼락’을 알 것이다. 어머니께서 불그스름한 생선을 어시장에서 사다 구워주신 기억이 있다. 작은 몸에서 나오는 쫄깃함이 젓가락질하게 만들었다. 밥도둑으로 배를 볼록하게 해서 볼락인지 저 배가 볼록해서인지 이리저리 이름의 유래를 추측해 봤는데 최근에야 볼락의 유래를 짐작하는 글을 읽었다. ‘우해이어보 (牛海異魚譜)’라는 책에서다.


    이곳 사람들은 ‘보라어’를 ‘보락’이나 ‘볼락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방언에 엷은 자주색을 ‘보라’라고 하는데, ‘보’는 아름답다는 뜻이니 ‘보라’라는 것은 ‘아름다운 비단’이라는 말과 같다. ‘보라’라는 물고기의 이름은 반드시 여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김려, ‘우해이어보(박준원 역)’ 가운데


    우해이어보는 ‘우해에 사는 이상한 물고기 도감’으로 1803년 출간됐다. 우해로 유배온 담정 김려가 2년에 걸쳐 쓴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도감’으로 1814년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보다도 11년가량 빠른 것이다. 그렇다면 김려가 어류를 조사한 우해는 어디일까. 그는 서두에서 우해는 진해의 다른 이름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진해는 군항제 벚꽃으로 알려진 지금의 진해가 아니다. 여기서 진해는 진해현이 있던 곳, 고려시대까지는 우해현이었던 마산 진동면 일대를 가리킨다.

    김려는 이 지역 일대를 세들어 사는 집 아이와 함께 배를 타고 마산 앞바다를 돌아다니며 물고기를 관찰했다고 적고 있다. 그는 볼락을 비롯한 어류 53항목, 갑각류 8항목, 패류 11항목 등 모두 72항목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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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년 전 그의 호기심 찬 발걸음을 따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요장리에 있는 광암항으로 향했다. 먼저 다다른 곳에 작은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마산에서 드물게 모래사장이 있어 바다 가까이에 앉아 다가갈 수 있는 곳, 광암해수욕장이다. 1976년 돌과 굴껍데기로 얽힌 갯벌 위에 모래를 부어 만든 작은 해수욕장은 인기가 많았으나 수질이 나빠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줄면서 지난 2002년 폐쇄됐다. 그러다 보니 둘러봐도 모래 사장 위 사람이 없다.

    잠시 개인 해수욕장으로 삼고, 발자국 드문 해변을 걷는다. 잔잔한 파도소리와 부딪치는 바람소리, 갈매기 소리, 발 아래 모래 소리가 한데 어우러진다. 방해받을 일이 없어 작은 움직임에 민감하다. 김려 선생도 이 근처에서 그러했으리라 여기며 쪼그려 앉아 모래와 바다의 경계를 지켜본다. 손톱만한 게와 조개, 밀려온 홍합더미가 보인다.

    맑은 바다가 아니라 바다 안을 들여다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짧은 탐사를 끝내고 일어선다. 해변가에는 오래됨직한 횟집이 보인다. 이곳 광암해수욕장이 번성했을 때는 인근 횟집의 볼락 매운탕이 유명했다고 한다. 김려 선생이 살던 그때와 2015년 사이를 볼락들이 줄지어 잇고 있는 듯하다.

    해수욕장을 왼쪽에 두고 끝까지 걸어가면 광암항 방파제길이 나온다. 김려 선생이 배를 타고 나간 마냥 바다 쪽으로 향할 수 있는 길이다. 조금 흐린 날씨, 바닷바람이 불어와 시원했다. 이곳에도 사람이 없어 짧지 않은 이 길은 온전히 한 사람만을 위한 카펫처럼 바다로 안내한다.

    왼쪽으로는 겹겹의 섬과 바다, 흰 양식장 부표가 만들어 내는 그림이, 오른쪽으로는 항구에 정박해 윤슬 사이로 떠 있는 배들의 모습이 전시돼 있다. 천천히 감상하며 나아가니 앞쪽 저멀리 방파제가 끝나는 곳에는 빨간 등대와 갈매기 떼가 바다를 배경으로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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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옛 광암해수욕장.


    오른쪽 멀리에는 200년 전과 같이 이 바다에서 나는 산물들을 갖고 먹고사는 어민들의 일터가 보인다. 우해이어보에 나오는 고기들이 새벽에 누워 있을 창원서부수협광암활·선어위판장과 냉동창고다. 잡은 고기를 팔고 나누고 저장하는 이곳. 어민들이 모이는 수협이 눈에 들어온 이유는 김려 선생이 물고기에 대한 설명을 쓸 때 물고기의 모습이나 특징만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지역 어로작업, 수산물의 유통과정, 조리방법과 섭취 시 효용과 부작용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으로 기술했다. 그래서 ‘용서’라는 뱀장어처럼 생긴 물고기가 안개를 토한다든지, 대게의 껍데기로 지붕을 덮는다든지, 새가 물 속으로 들어가면 조개가 된다든지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까지 담겨있는 것이다. 옛 어부들이 항구에서 잡은 고기들을 날라 펼쳐놓았을 모습이 수협건물과 겹쳐 보인다.

    사람 사는 모습이 더 잘 드러나는 대목은 ‘우산잡곡’이다. ‘우산의 시시한 노래’라고 이름붙인 것인데, 김려 선생이 우해이어보 어패류 설명 끝에 남긴 자작 한시를 일컫는다. 주로 어로작업방식과 어촌의 풍광, 이곳 여인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다 모으면 칠언절구 39수가 된다.

    지난봄 우해이어보를 새로이 번역한 두류문화연구원 박태성 연구위원(53)은 “우해이어보는 과학적 성격을 띠고 있는 도감이면서도 문학적 요소인 시가 결합돼 있는 책이다”며 “당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담아 민속학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요즘 유행하는 인문과 과학의 만남이 아닌가. ‘볼락’ 편 끝에 달린 우산잡곡을 떠올리며 방파제를 걷는다. 노을이 질 때 아름답다는 이 방파제길에 어둠이 찾아와 오른편 항구에 배가 빼곡히 몰려들고 사공들이 상자를 나르는 모습이 상상된다.



    달 지고 까마귀 울어 바다는 저무는데/저녁 밀물 밀려들어 사립문 때리누나/아마도 볼락 실은 배 도착했는지/거제도 사공들 물가에서 떠들어대네

    -볼락 편 우산잡곡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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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광암항 방파제 끝에 자리잡고 있는 등대.


    ‘볼락은 이곳보다 거제도에서 더 많이 잡혀 거제도 어부들이 보라를 저장해와 이곳에서 모시와 바꾸어갔다’는 볼락 본문 내용을 읽고 우산잡곡을 읽으면 이해할 수 있다.

    김려 선생은 고향도 아닌 유배온 이곳 진해(진동)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우해이어보를 썼다. 그는 학문적 목적 없이 사람들과 왕래하고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먼 훗날 그의 후배가 된 성윤석 시인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성 시인은 마산 어시장에서 일하며 어시장 사람들을 다룬 시집 ‘멍게’를 펴냈다. 장어, 해파리, 임연수, 적어…그의 시집 목차도 우해이어보처럼 어류로 가득하다. 어시장 사람들 이야기가 실린 시집 가운데는 ‘우해에서 우해이어보를 읽다’도 있다.

    “마산으로 내려와서 어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벌어지는 일들을 문학판에서는 처음 기록해 알려보겠다 생각했는데, 200년 전에 먼저 쓴 분이 계시더라고요. 그분에 대해서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두 세기 이상 차이 나는 두 명의 시인. 물고기를 먼저 내보였으나, 그들의 관심은 결국 사람을 향해 있다. 사람보다 돈이 우위에 자리하기 쉬운 지금 물고기와 사람들을 끈덕지게 들여다본 두 시인의 마음이 고결하다.

    어느새 방파제 끝까지 걸어왔다. 바다가 가까워 낚싯줄을 걷어 올리면서 이번에 또 어떤 고기가 잡힐까 생각하고, 고기의 맛과 잡는 법에 대해서 묻고 다니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사람이 그려졌다. 그러고는 또 다른 사람에게 이곳 이야기를 들려주려 붓을 드는 사람의 모습도. 어시장에서 상자를 나르며 시장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도 떠올랐다.

    몸을 돌려 다시 해안으로 향한다. 아름다운 비단 같은 보라어, 볼락에서 시작된 관심, 사람에 대한 관심,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리라는 볼록한 마음을 안고.

    글= 이슬기 기자 good@knnews.co.kr

    사진 = 성승건 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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