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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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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걸을 수 있는 동네, 걸을 수 있는 도시- 김지율(시인)

  • 기사입력 : 2015-08-25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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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도 있지만 개방되어 있는 주변과 아는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는 잦은 인사 때문에 동네 걷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만의 속도로 같은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어지러웠던 생각과 마음을 조용히 정리할 수 있고 앉아 있을 때는 떠오르지 않던 좋은 생각들을 만날 때도 있다.

    편한 신발을 신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 보면 평소 쓰지 않던 감각들이 자연스럽게 열린다. 그런 생각들은 다비드 르 브로통의 ‘걷기 예찬’에서 얻은 공감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더 작은 걸음으로 더 느리게 걷는 것은 자기 시간의 유일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자기와 다른 세계로 마음을 열어 놓는 것이고 세상의 침묵에 적극 동참하는 일이다.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제각기 다른 결을 가진 소리와 이웃들의 모습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이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 그 시간의 소중한 떨림을 같은 길에서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끼는 것이다.

    새로 생긴 빵가게를 지나 할머니 칼국수 집을 지나면 휴대폰 가게가 나온다. 몇 걸음을 더 걸으면 단골 옷 수선집이 나오고 길을 건너면 미용실이 있다. 그 길 오른쪽 골목에는 아주 오래된 목욕탕과 짜장면이 맛있는 중국집이 있다. 큰길 쪽으로 나오면 편의점이 있고 조금 더 걷는다면 제각기 다른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을 것이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 매일 먹는 음식과 풍경들. 어쩌면 나는 이 동네와 아주 많이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동네의 원주민들과 신축아파트 주민들이 어설프게 어울려 있는 이곳에서 나는 오랫동안 살았다. 원주민들은 뒷산의 제철 과일과 채소를 아파트 담벼락에 줄 지어 앉아 팔고 있다.

    새 길이 생기고 그 길을 따라 하루가 다르게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기자기하고 작은 커피집들이 많이 생기는 건 나로선 기쁜 일이다.

    비 오는 날 그 앞을 지나며 커피 냄새를 맡는 것도 좋고 나도 모르게 그 냄새에 이끌려 혼자 마시는 커피도 제격이다.

    잘 걷는 것은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걷는 것은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은 만나는 것이다. 잘 걷는다는 것은 가장 정직하게 느끼는 것이고 자기를 더 내려놓고 가벼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 걷는 사람은 마음이 아주 넓은 사람일 것이고 분명 좋은 사람이 틀림없을 것이다.

    좋은 동네, 좋은 도시는 화려함과 기능적인 시설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건물, 시설들이 많은 곳이다.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이 더 있고, 공원이나 나무들이 조금 더 많은 곳이면 좋겠다.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많고 차나 건물을 우선시하는 길보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아름다운 길이 많은 곳이다. 그런 곳이 누군가 말하는 명품도시(?)가 아닐까. 잘 걸어 다닐 수 있는 동네는 더디지만 계속 발전하게 될 것이다. 걸을 수 있는 동네와 도시만이 우리를 덜 외롭게 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하니까.

    돌아오는 길, 트럭에 가득 실려 있는 아오리 사과를 한 봉지 샀다. 검은 봉지를 들고 걷는다. 한 개를 덤으로 얻어 더 기쁘다. 그 연두 껍질을 아주 천천히 깎는다면 둥근 사과의 길을 온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걸었던 길, 누군가 걸어가고 있는 길. 그 길을 걷는 하루하루, 오늘 문득 그 길에서 오래 걸었던 당신을 만난다면 이제 기쁘게 인사를 나누어도 좋을 것이다.

    김지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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