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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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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9) 캔버스에 담긴 하동 악양과 악양의 길

세월의 더께가 층층이 내려앉은 자연을 닮은 길

  • 기사입력 : 2015-09-03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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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금했습니다. 도시를 떠나 25년간 골짜기만 찾아다니며 은둔하듯 살아온 화가에게 영감을 준 길은 대체 어떤 곳인지. 또 그에게 길은 어떤 의미인지.

    그래서 찾아가봤습니다. 아무 기교 없이 무심하게 그려진 작품 속 외길.

    그 길의 모티프가 된 ‘하동 악양’으로 말입니다.

    악양(岳陽). 지명처럼 뒤로는 지리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습니다.

    앞으로는 양지바른 너른 땅 평사리 들판이 펼쳐지고 섬진강이 굽이쳐 흐르지요.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평화로운 이곳 악양에 서양화가 박현효(53)씨의 집과 작업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기 힘든 깊숙한 자연에 들어앉아 작품활동을 하는 그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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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화가 박현효(오른쪽)씨와 강지현 기자가 하동군 악양면 상신마을 돌담길을 걷고 있다.

    ◆작품 속의 길

    작가는 스스로를 자발적 유배자라고 말합니다. 지난 25년 동안 거창 합천 진주를 거쳐 하동에 이르기까지 해발 1000m 이상의 골짜기만 찾아다니며 살았기 때문이죠. 8년 전 정착해 살고 있는 지금의 집 역시 산중턱 골짜기 옆입니다.

    “악양에 살면서 느낀 포괄적인 감정을 담은 악양스러운 작품입니다.” ‘악양에서’라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그림만큼이나 간명합니다.

    그의 그림엔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최소한의 색과 구도로 압축해 놓은 듯 간결하고 소박합니다. 지천으로 널린 야생차밭을 질박한 찻잔으로 표현하는 식이지요.

    푸른색을 띤 찻사발 위로 소복이 담긴 붉은빛의 땅. 그 위엔 집 한 채, 소나무 한 그루, 푸른 돌 몇 개, 길 하나가 전부입니다.

    하얀옷을 차려입은 채 길 위를 걸어가는 저 사람이 작가냐는 물음에 “나일 수도 있고 우리 모두일 수도 있다”는 아리송한 대답이 돌아옵니다. 심지어 자신의 그림을 이해하려면 먼저 악양을 알아야 한다는군요. 그의 안내를 받아 악양스러움이 묻어나는 악양의 길 세 곳을 둘러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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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효 作 ‘악양에서’


    ◆하덕마을 골목길

    최참판댁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입석리 하덕마을 골목길갤러리 ‘섬등’에 들렀습니다. 골목길 전체가 갤러리로 꾸며진 이곳은 흔히 볼 수 있는 벽화마을이 아닙니다. 느림이 있고 예술이 있고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곳은 일본군위안부 고 정서운 할머니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골목길을 따라 차(茶)를 주제로 따뜻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악양에 사는 작가 5명을 포함해 27명의 예술인이 이곳 사람들을 인터뷰해 벽화와 철제 조형물, 설치작품 등을 만들었다지요. 이곳엔 박 작가의 ‘달 아래서’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차꽃, 찻잔, 천년차나무, 바람차…. 골목길을 수놓은 작품들은 마치 그곳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습니다. 돋보이기 위해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았더군요. 소박한 멋과 절제의 미(美). 골목 곳곳에선 슬로시티 악양이 꿈꾸는 느린 삶의 모습도 엿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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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군 악양면 매암차문화박물관 차밭길.


    ◆매암차문화박물관 차밭길

    매암차문화박물관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입구에 있는 멋스런 하얀색 목조건물을 지나자 푸른 차밭이 펼쳐지는데요. 눈에 담기는 아담한 차밭이 소박하고 정겹습니다. 2만여㎡의 차밭을 40여 년간 자연농법으로 가꿔왔다는군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차를 재배하는 건 이곳의 철칙인데요. 그래서인지 차나무보다 높게 자란 잡초도 미워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봄 여린 찻잎을 내준 차나무는 이제 짙은 초록빛으로 가을을 기다리고 있네요. 차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봅니다. 발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마치 폭신한 초록 융단을 밟는 느낌입니다.

    차밭의 초록빛으로 눈을 정화했다면 ‘매암다방’에 들러 은은한 차향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차밭 한편에 있는 주황색 건물로, 주인장 없이 자율로 운영됩니다.

    작가는 지난 2007년 전시회를 열며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는데요. 오랜 인연만큼이나 이곳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다방 옆 야외데크에서는 마을행사가 곧잘 열립니다. 입구에서 본 건물은 일제시대 지어진 적산가옥인데요.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죠. 차 문화와 관련된 여러 유물들이 전시돼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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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군 악양면 하덕마을 골목길갤러리 ‘섬등’.


    ◆상신마을 돌담길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상신마을인데요. 이 마을엔 유난히 돌이 많아 집 안팎을 돌로 쌓았답니다. 미로를 연상케 하는 돌담길이 얼기설기 이어집니다. “갈래길이 나와도 당황하지 마세요. 악양의 길은 결국엔 하나로 통하거든요. 시간만 허락한다면 마음껏 여유를 부려도 됩니다.”

    그의 말대로 이곳에선 무언가에 쫓기듯 걷는 도시인의 빠른 걸음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느릿느릿 걸음으로 구불구불 돌담길을 따라 걸어봅니다. 푸른 이끼가 내려앉고 이름 모를 넝쿨로 뒤덮인 돌담에선 세월의 흔적이 묻어납니다. 대문 안에서 구성진 사투리가 들리기도 하고, 담 너머로 감나무가 손 내밀어 인사를 건네기도 합니다.

    골목길 끝에 다다르니 조씨 고가가 나옵니다. 최참판댁 세트장의 실제 모델이 된 곳이라죠. 160년 전 소나무를 쪄 16년 동안이나 지었다는 조씨 고가와 기와를 얹은 돌담에선 고답스러운 멋이 느껴집니다.

    작가와 함께 악양의 길을 걷고서야 그림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작가가 말한 악양스러움의 의미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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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양에는 자연의 너그러움과 여유로움, 느림의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악양스러운 삶은 자연을 닮은 삶이더군요. “복잡한 게 오히려 불편하다”는 작가는 이미 악양 그 자체였습니다.

    다시 들여다본 그림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 길의 끝엔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과 낙원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러니 지금 가는 길이 고단할지라도 묵묵히 걷다 보면 언젠가는 그곳에 다다를 거라고.

    “내 그림은 보는 이가 놀다 가는 곳”이라고 했던 작가의 말이 떠오르네요. 이제야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이 우리 모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 강지현 기자 pressk@knnews.co.kr

    사진= 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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