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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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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 유림영수(儒林領袖)- 선비 사회의 지도자

  • 기사입력 : 2015-09-0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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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숙종(肅宗) 때 예법 논쟁 등으로 당쟁이 매우 격렬한 편이었다. 노론(老論)과 남인(南人)으로 나뉘어 당쟁을 하며 숙종 때만 세 차례 정권교체가 있었다.

    이때 노론의 영수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이었고, 남인은 미수 허목(許穆) 선생이었다. 두 분은 단순한 정치가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였다. 우암은 우리나라 모든 학자 가운데서 문집량이 제일 방대해 200권이나 되고, 그 밖에도 저서가 많다. 학파로는 율곡(栗谷)의 학통을 이었고, 학문 경향은 철저하게 주자학(朱子學)을 추종했다. 미수는 퇴계(退溪)의 학통을 이었고, 주자학의 속박에서 벗어나 공자(孔子) 맹자(孟子)의 원래 유학을 추구했다.

    역시 많은 저서를 남겼고, 독특한 전서(篆書) 글씨로 유명하다. 미수는 퇴계의 학통을 기호지방에 전해 성호(星湖) 이익(李瀷),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의 길을 열어 줬다.

    미수는 경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636년 병자호란 직후에 의령으로 내려와 10년 정도 살다가 고향 연천(漣川)으로 돌아갔다. 그때 잠깐 함안, 창원 등지에도 옮겨 살았는데,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등 지방의 학자들과 교유했다.

    지금도 그 아우의 후손들이 의령 대의면 모의(慕義) 마을에 살고 있다.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 그 스승 한강(寒岡) 정구 (鄭逑)선생과 함께 모셔져 유림들이 제사를 받들고 있다. 그가 살던 달천(達川)계곡에는 달천정이 있고, 유허비도 세워 놓았다.

    그의 고향 연천에는 숙종이 지어 준 은거당(恩居堂)이라는 집이 있고, 그의 묘소도 그 서쪽 400m 거리에 있다. 은거당은 6·25전쟁으로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필자는 가끔 대현(大賢)의 묘소를 참배해 왔다. 우암의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에 있어 몇 년 전 참배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미수의 묘소는 민통선 북쪽이라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락 안 되고 있다.

    미수의 종손이 여러 해에 걸쳐 노력해 묘소 정비를 다 마치고, 평소에 참배하고 싶어하던 유림들에게 참배할 기회를 만들었다. 9월 3일 참배할 날로 받았다. 2일 오후 진주에서 정옥영(鄭玉永), 김종진(金鍾進), 문영동(文映東) 동학들과 경기도 연천에 가서 자고, 그 이튿날 여러 유림들과 함께 묘소를 참배했다.

    진주에서 제수, 제문, 제례 홀기를 준비해 가지고 가서, 전통 전례(典禮)대로 엄숙하게 제례를 올리고 제문을 읽었다.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대학자로서 후세의 공부하는 사람들이 존모(尊慕)하는 뜻을 표하고 그 학문과 덕행을 배우겠다는 다짐이었다. 시종 감격한 마음 금할 수 없었다. ‘영수(領袖)’는 본래 ‘옷의 깃과 소매’를 말한다. 옷에서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어떤 단체의 중요한 인물을 영수라고 하는 것이다.

    * 儒 : 선비 유. * 林 : 수풀 림.

    * 領 : 거느릴 영. * 袖 : 소매 수.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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