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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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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108) 고성 (18) 고성읍 고성탈박물관~거류면 무애암

“불행 없도록”…‘탈 막는 탈’에 깃든 옛사람의 소망
잡귀·악령 물리치려 원시시대부터 만든 ‘신앙탈’

  • 기사입력 : 2015-09-08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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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촉촉한 비가 내리고 나서 들판에 바람이 풀리니 가을이 오는가 보다. 길을 따라가는 고성 벽방산 자락에도 서늘한 바람이 고이고 구름이 머물러 있었다. 세상살이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시간을 따라가는 우리들의 삶은 인류 연속성의 한 부분일 뿐이다. 공업이 발달하고 자본과 시장이 지배를 하는 무한경쟁의 세상이지만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자녀를 인류에 기여하는 올곧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부모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어릴 때부터 책을 읽히고 많은 것을 보며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자녀가 다양한 견문을 넓히도록 한 발짝 물러서서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인생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자녀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해서 선택하고 결정하도록 하고 실패가 따르더라도 본인이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부모가 꼭 해야 하는 가장 올바른 자녀교육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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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읍 고성탈박물관에 전시된 탈들. 잡귀와 액운을 물리치려는 의도에서 만든 ‘신앙탈’ 종류가 많다.

    고성탈박물관. 고성오광대보존회

    고성읍 율대2길 23번지에 고성탈박물관이 있다. 고성탈박물관은 전신 갈촌탈박물관 이도열(73) 관장이 기증한 377점의 유물을 바탕으로 2005년 12월 28일 개관했다. 연면적 8712㎡의 건물에 상설전시실과 특별전시실, 체험실, 수장고, 학예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고성오광대 탈을 비롯해 우리나라 13개 무형문화재에 쓰이는 탈을 고루 전시하고 있다. 모방을 했지만 신라 때의 탈도 있고, 무속신앙에서 쓰였던 탈도 있다.

    우리 문화에서 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호기심이 갔다. 보통 탈을 얼굴에 쓰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꼭 얼굴에 쓰는 것만은 아니었다. 발에 씌우는 발탈도 있고, 장군 탈과 같이 무속에서 신의 모습을 뜻하는 탈도 있었다. 또한 탈은 대개 탈춤에 쓰이지만 귀신을 쫓기 위해 사용하던 탈도 있었고, 장례식에 사용한 탈도 있었다.

    탈의 기원은 원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시시대는 모든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악령을 이겨 물리치고 선령을 위해 주술의 힘을 빌려왔다. 탈도 그 주술의 하나였다. 이후 탈에 무용이 첨가된 것은 주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탈은 크게 신앙탈과 예능탈로 나눠지는데 신앙탈이 먼저 생기고 후에 무용과 재담이 더해져 예능탈이 발전했다.

    고성탈박물관은 신앙탈에 대한 것이 많다. 신앙탈은 잡귀나 액운을 물리치려는 의도에서 만들었으니 ‘탈을 막으려 했던 탈’임을 알 수가 있었다. 옛날에는 사용한 탈을 불태워 없애거나 땅에 묻었는데, 탈에 온갖 악귀와 액운이 붙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곧 ‘탈(액운이나 사고)은 탈(가면)’이라는 뜻이다. 박물관에서 탈의 뜻은 탈을 막는 모든 것으로까지 이해된다.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탈에 대한 것을 공부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관장은 현재 고성오광대 탈놀이 기능보유자이며 장인이다. 그는 1978년 고성오광대를 통해서 탈에 입문한 후 이제는 단순한 예능탈의 차원을 넘어서는 탈을 제작하고 있다. 고성탈박물관은 그의 오랜 노력의 결실이다.

    인근에 고성오광대보존회가 있다. 고성오광대는 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이다.

    고성오광대는 고성지방에서 전승되는 탈놀이다. 이 놀이는 경상도 합천초계 밤마리 장터 대광대패의 탈놀이에서 영향을 받았다. 본래는 정월 대보름 축제에 놀았으나 나중에는 봄, 가을에 노는 것으로 오락화됐다. 고성 오광대는 다섯 마당으로 구성돼 있다.

    첫째마당은 ‘중춤’이다. 중과 각시가 굿거리장단에 맞춰서 춤을 춘다. 중이 각시를 유혹하고 각시는 마주보고 그에 응하는 요염한 춤을 춘다.

    둘째마당은 ‘문둥이’로, 오그라진 손으로 소고를 들고 등장해 벌벌 떨면서 문둥이의 흉내를 내며 춤을 춘다.

    셋째마당은 ‘오광대’로 양반이 위엄을 부리고 마부인 말뚝이에게 인사를 강요하지만 말뚝이는 반항한다. 양반이 말뚝이를 윽박지르면 슬그머니 말을 돌려서 변명하고, 양반은 그것을 듣고 속아서 더욱 바보스럽게 된다.

    넷째마당은 ‘비비’이다. 비비는 무엇이든지 잘 잡아먹는 상상의 동물로 영노라고도 한다. 고성오광대에서는 호드기와 비슷한 것을 불어 ‘비―비―’하고 소리를 내며 양반을 혼내기 때문에 ‘비비’ 혹은 ‘비비촐촐이’라고 한다. 비비가 양반을 만나 무엇이든지 잘 잡아먹는다고 위협한다. 양반은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양반이라고 하자 비비가 양반은 더 잘 잡아먹는다고 한다.

    다섯째 마당은 ‘제밀주’이다. 본처인 할미가 등장하여 집을 나간 영감을 찾아다니고, 영감은 제밀주(혹은 제밀지)라는 첩을 데리고 나타난다. 제밀주가 득남하고 할미가 그 아이를 어르다가 떨어뜨려 죽여서 제밀주에게 맞아죽고 할미의 상여가 출상한다. 이것은 다른 지방 오광대의 영감·할미 마당에 해당한다.

    고성 오광대는 춤과 재담, 소리와 몸짓으로 이어나가는데 특히 덧배기 춤이 돋보인다. 매년 2회에 걸쳐 전승 사업을 하고 있고 전수교육관에서는 상설 공연도 하고 있다. 공연 일정이 맞지 않아 고성오광대 공연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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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나무 숲이 우거진 벽암사 가는 길.


    벽암사. 무애암

    옛 소가야 들판을 지나 벽방산으로 향했다. 도로변에는 옥수수 노점상들이 있었다. 교통사고의 위험이 있어 보였다. 생계를 위해 도로변으로 나서는 서민들의 삶도 팍팍한 모양이다. 행정기관의 안전대책이 필요하다.

    벽방산은 불가에서는 벽발산이라고도 부른다. 석가모니부처의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인 가섭존자가 벽발(碧鉢 바리때)을 받쳐 들고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성산으로 여긴다. 벽암사로 가는 길목에 꽃이 핀다는 만화방초화원이 있었다. 대문은 잠겨 있고 개 짖는 소리만 들렸다.

    전나무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가면 산정 아래 작은 절집 벽암사가 있다. 벽암사는 대웅전과 요사채만 있는 작은 절집이다. 절집이 규모가 크고 고찰보다는 작은 절집에서 더 사람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벽암사에 들어서니 능소화와 수국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벽방산 벽암사 대웅전을 등지고 서서 해지는 고성벌판을 바라보니 바람 풀리는 모습에 벼들이 색상을 바꾸며 한 폭의 동양화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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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애암 바위벽을 타고 흐르는 물.


    자연이 주는 풍광에 빠져 있는데 인기척을 느낀 절집 요사채에서 중년의 비구니스님이 정성스럽게 차를 끓여 내왔다. 산명(87) 주지스님이 방에 있다며 안내를 자청했다. 방으로 들어서니 반갑게 맞이했다. 찻잔을 놓고 있는데 초등학생 2명이 옆방에서 나와 인사를 했다. 그전에도 아이들을 입양시켜 키웠는데, 사춘기를 거치며 반항하고 방황하는 것을 천자문을 읽히며 극복을 했는데, 부처님 봉안보다 아이들 교육이 더 어렵다고 했다.

    약 40년 전 토굴에서 수행을 하던 중 찾아오는 사람들이 고생을 했다. 정월달에 얼음이 얼지 않는 터를 잡아 절집을 지었다고 했다. 현세에 성불을 하지 못해도 절을 세우고 나면 후세에 도움이 될 거라 했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불교에 대한 책을 건네주었다. 노스님은 밥은 항상 주겠다며 또 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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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벽 아래 있는 무애암의 법당.


    벽암사를 나서는데 왼쪽으로 가파른 길에 무애암 안내판이 있었다. 1t 트럭과 오토바이는 길이 위험해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판이 있었다. 가파른 길을 따라 어렵게 올라가니 벽방산 절벽 아래에 무애암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도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야 했다.

    무애암은 원래 봉덕사라는 이름으로 90여년 전 창건됐다. 주지 법혜(72)스님에 따르면 처음에는 길이 없었다고 했다. 비구니스님이 있다가 산에 땔감을 하러 갔다 다치는 바람에 6개월이나 절집이 비어 있었는데 2008년 4월 인연 따라 왔다고 했다. 법당에 벼락이 떨어져 파손됐으나 불상과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옛날에는 산 위에서 논농사를 할 정도로 물이 풍부했다. 바위벽을 타고 흐르는 물은 가뭄이 와도 마르는 일이 없다고 했다. 결코 수도나 생활이 쉽지 않아 보이는 무애암에서 귀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행복한 마음으로 귀가를 서둘렀다.

    심재근 (마산대학교 입학부처장·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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