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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3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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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10) 故 황선하 시인 발걸음 따라 걸은 창원 용지못길

이슬처럼 살다간 시인의 삶이 詩로 남은 길
나고, 자라고, 일하며 20여년간 산 창원
그 세월만큼 익숙한 용지호수

  • 기사입력 : 2015-09-10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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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황선하 시인이 걸었던 창원 용지못길. 그는 말년에 간암으로 투병하던 시절, 용지못 근처 아파트에 거주하며 매일 저녁 이 길을 걸었다.
    익숙하다는 것은 대상을 아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늘 가까이 있고 자주 만난다는 것 때문에 알고 이해한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정작 물어보면 놀라우리만큼 무지할 때가 많다. 익숙하기에 관심을 덜 기울이게 되기도 하니까. 익숙함을 생활하고 있는 터전, 창원 안으로 끌고 왔다.

    나고, 자라고, 지금도 일하고 있는 곳, 꼽아 보면 20년 이상 산 곳이 됐다. 그 가운데서도 유치원 때 소풍 장소로 시작해서 지금은 회사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있는 휴식처로 찾아가는 용지호수가 있다.

    면적 5만4600㎡, 둘레는 1169m. 수로 표현하니 잘 와닿지 않는다. 이 도심에 어떻게 거대한 호수가 생겨 시민들이 오가고, 밤에 불빛이 도는 분수가 생겨났는지, 이 호수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지나쳐 왔다. 속속들이 알지 못해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봄에는 뿌연 얼굴로 분분히 물결에 떨어지는 벚꽃이, 여름에는 장밋빛 하늘과 같이 물드는 물빛에 감탄했다. 가을에서 신호등색으로 바뀌는 단풍과 겨울에는 하얀 평원을 보여주는 덕에 사시사철 눈이 즐거웠다.

    큰 호수가 품은 시간이 문득 궁금했다. 조선시대 건립된 농업용 저수지라고 했다. 1469년에 발간된 ‘경상도속천지리지’의 창원 제언 기록에 따르면 저수지 이름은 ‘용지제’로 창원도호부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27결 35부의 농지에 물을 공급했다고 나와 있다. 광복 이후에도 농업용수의 저장기능을 담당했으나 1974년 이후 창원이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시민들의 휴식처로 변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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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시간 물을 품어온 곳이라는 호수의 역사와 더불어 용지못의 시인이 있다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됐다. 이름대로 살다간 시인이라는 말이 붙는 사람이었다. 고(故) 황선하 시인이다.

    그가 시집 계약을 위한 서울행에 동행한 제자 정일근 시인은 그를 ‘진짜 시인, 큰 어른’이라 칭했다. “정말 선한 분이셨지요. 이름에 선할 선, 물 하 자를 쓰셨는데 말그대로 착하게 흘러가는 물처럼 자신의 인생을 살다 가셨어요.”

    그는 평생 한 권의 시집이면 족하다고 했던 말처럼, 단 한 권 ‘이슬처럼(창작과비평사)’만을 펴냈다. 출판 의뢰가 들어와도 고민을 거듭한 데서 그의 염결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세상을 떠난 뒤에야 또 한 권의 유고시집 ‘용지못에서’를 남겼다. 간암을 앓던 중 매일 집 앞 용지못을 운동 삼아 걸으면서 남긴 시편들을 모은 것이다. 30편은 ‘용지못에서’라는 제목의 연시다.

    절반 가까이는 작품을 쓴 날짜도 나와 있어 일기 성격을 띤다. 용지못을 도는 습관은 ‘용지못에서-소망’에 기록해놓고 있다.

    퇴근하면, 아내가 정성껏 짜 주는 한 컵의 녹즙을 마시곤, 거울 앞에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곤, 집 근처 용지못 둘레를 두 바퀴 돕니다. 한 바퀴만 돌 적도 있고, 세 바퀴나 돌 적도 있습니다. 못 둘레를 도는 거리만큼 소망이 덩굴마냥 벋어나, 언젠가는 하느님의 발바닥에 닿으리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용지못에서 - 소망’-1994.6.13



    그의 습관 따라 용지못을 돌아보기로 했다. 창원 자유총연맹 회관 쪽 화단에서 시작했다. 2001년 떠난 그에게 시간을 거슬러 다가가리라, 시계 반대방향으로 향했다. 왼쪽으론 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나무를 끼고 걷는 길.

    누군가를 떠올리며 걷는 길은 잠시 그의 눈이 돼 주변을 살피게 된다. 가을 문턱이라는 것은 선선해진 바람으로만 감지했는데 어느새 잎이 노래져 있다. 버드나무는 푸른 잎을 매단 채 물가를 더듬고, 길에 아치문을 그리고 있었다. 산책 온 사람들이 그 아래를 환하게 지났다. 황 시인은 이름에도 물을 담고 있듯, 평생을 물가서 보냈다. 태어난 건 경북 월성의 감포 바닷가였고, 많은 날을 진해에서 살면서 해군 군무원으로 일했다. 말년에 이곳 창원 용지못 근처 롯데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는 처음에 아파트에 살면서 답답해했다고 한다. ‘발견’이라는 시에서 3층은 투신하기 좋은 층이라고 할 만큼. 그런 그에게 용지못이 바다가 되어줬다.

    온통 붉게 물든 바다를 보았는가./보았는가./바닷물 밑에서 우짖는 새소릴 들어봤는가./들어봤는가./해가 뜨고 질 무렵/그대 홀로 용지못에 와 보아라./그지없이 넓어 뵈는/못물이/놀빛에 온통 진달래꽃빛으로 물들어(…)/아름다운 꿈을 꾸는 이에게는/용지못이/못이 아니라/바다다. 바다다. -‘용지못에서 - 용지못은 못이 아니라 바다다’ 일부



    바다가 된 용지못, 불어오는 바람이 바닷바람이라고 생각하며 걷는다. 곳곳에 벤치가 고즈넉하고 오기 직전 크게 뿌린 비에 낙엽이 뒹굴었다. 황 시인은 10년간 병마와 싸우며 이곳의 사계절을 지켜봤고, 이들로 희로애락을 표현해냈다. 사람 없는 벤치, 버들잎, 수면 위를 떠 가는 청둥오리 한 마리의 의미가 남달랐을 것이다. 몸을 가누기 힘들어지거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몰려올 때도, 병이 호전돼 퇴원하는 기쁨을 누릴 때도 용지못에서 살아가는 것들과 함께 나눴기 때문이다. 약해지는 마음과 부단히 싸우고, 생의 결심들을 이뤄나갔을 이 용지못길을 두고, 후배시인이 ‘작은 순례길’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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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론으로 촬영한 용지호수 전경.


    간밤 센 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진 푸른 떡갈잎 한 잎이 내가 슬픔에 잠겨 있는 벤치 곁에 기척없이 엎어져 있었습니다. 엎드려 소리 죽여 울고 있는 나를 보는 것 같아 찡해 뒤집어 놓았습니다. -‘용지못에서 - 투병기’ 전문 -1998.6.12



    꿀밤 맞듯 머리 위로 도토리가 떨어져내려 두 알을 주워들고 만지작거리며 간다. 호수를 반 이상 돌았을까. 두리번거리며 찾아 헤맨 바위 하나가 있다. 익숙한 곳인 나머지, 지나치면서도 눈길주지 못했던 비석, 물가를 지켜보고 있는 물방울 같은 비석이 서 있다. 그를 기리며 후배 동료시인들이 세워준 시비다. 평생 한 권 남긴 시집의 표제작이면서 그의 삶을 응축해놓은 ‘이슬처럼’이 윤판기 선생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길가/풀잎에 맺힌/이슬처럼 살고 싶다./수없이 밟히우는 자의/멍든 아픔 때문에 밤을 지새우고도,/아침 햇살에/천진스레 반짝거리는/이슬처럼 살고 싶다./한숨과/노여움은/스치는 바람으로/다독거리고,/용서하며,/사랑하며,/감사하며,/욕심 없이/한세상 살다가/죽음도/크나큰 은혜로 받아들여,/흔적 없이/증발하는/이슬처럼 가고 싶다. - ‘이슬처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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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지호수 내에 세워진 황선하 시인을 기리는 시비.


    이름 석 자 가운데 두 글자가 포함된 익숙함에 묘한 기분을 느끼며 읽어나갔다. 속눈썹 짙은 칠십의 노인이 옆에 나란히 서서 어깨를 도닥여주는 듯했다. 시집과 시비, 그의 모습이 그려지며 편안했다. 편안함은 웃는 모습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시집에서의 모습이 강건하고 굳건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온갖 고뇌를 솔직하게 보여준 덕분이다. 모두가 그런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좀 더 마음을 예쁘게 써도 되는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힘내라 등을 떠미는 것인지 발걸음이 빨라졌다. 한 바퀴 천천히 도는 데 35분,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편안한 마음은 호수를 떠나도 잔잔한 파문으로 오래오래 남았다.

    글= 이슬기 기자

    사진 =성승건 기자·드론촬영= 구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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