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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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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노래봉사' 이끄는 이미연 대한가수협회 사천시지부장

“노래는 못하지만 노래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답니다”

  • 기사입력 : 2015-09-1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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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가수협회 사천시지부가 주최한 올해 ‘삼천포아가씨가요제’ 행사에서 이미연 지부장이 박수를 치고 있다.
    노래는 지역과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노래는 감정과 심리에 영향을 미쳐 행동과 생각까지 변화시키는 에너지가 된다. 또 지친 육신을 위로하며 영혼을 소생시켜 삶의 활기를 불어넣는다.

    노래를 통해 중년의 삶을 가치 있게 가꾸고 효(孝)를 실천하는 이미연(48)씨. 그녀는 노래에 재능이 있어서도, 남들 앞에 나서기 좋아서도 아닌, 단지 노래로 봉사할 수 있다는 꼬임(?)에 속아 사단법인 대한가수협회 사천시지부를 만들었다. 지역에서 노래하는 사람,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 노래로 봉사하고픈 사람을 모아 어르신들을 초청하고 어르신들이 계신 곳을 찾아다녔다.

    각자의 재능과 시간을 나눈다는 마음으로 노래봉사를 시작했지만, 이젠 오히려 어르신들로부터 따뜻한 마음을 선물받고 돌아온다. 미연씨에게 노래는 어떤 조건도 성과도 필요 없는 행복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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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의노래’ 음반 출반 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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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9월 ‘삼천포아가씨 실화 스토리보드’ 제막식.

    크고 작은 마디의 삶

    사천시 선구동에서 출생한 미연씨는 운수업을 하던 아버지 덕에 비교적 윤택한 유년생활을 보냈다. 더욱이 늦둥이로 태어난 터라 부모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삼천포초등학교 4학년 무렵, 아버지 사업이 급격하게 기울어 외가가 있던 고성군 하이면으로 옮겨 하이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화훼 일을 시작한 아버지를 따라 김해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대학 진학을 준비하던 무렵 그렇게 사랑했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대로 운명하고 말았다. 너무 큰 충격과 상실감에 그녀는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렸다. 이때 “환경을 바꿔보라”는 어머니의 권유가 그녀를 구원했다. 일찌감치 일본에서 터를 잡고 있던 숙부를 찾아가면서 스무 살 전환기를 맞았다.

    도쿄 탁쇼쿠(拓殖)대학에 진학해 컴퓨터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하던 2학년 때 기회가 찾아왔다. 아시아에서 유명한 골프장 설계·감리회사인 (주)M&K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실력을 인정받아 정식 취업했다. 업무 특성상 외국 출장업무가 많았는데, 경륜이 쌓이자 회사는 무역회사인 (유)피플기획을 창립해 그녀에게 대표직을 맡겼다. 뿐만 아니라 회사의 배려로 레스토랑 사장도 할 정도로 그녀의 20대 삶은 도전과 성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서른 살 되던 해 위암이란 시련이 찾아왔다. 하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과 주변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됐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뵙듯 틈틈이 홀로 사는 일본 노인 가정을 방문해 봉사활동을 폈다.

    또한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하네다공항에서 통역봉사도 했다. 국내선만 운항하던 하네다공항에 그해 6월부터 김포공항을 오가는 임시 국제노선이 신설된다는 소식에 통역봉사를 자처했다. 한국어 안내방송에 그치지 않고 한국어 표지판을 만들도록 했으며, 공항직원과 자원봉사자들에게 한국어 강의와 예절교육을 했다. 특히 NHK 아침방송 ‘오하이요 니폰’에 두 차례 출연해 국제선 취항을 홍보하면서 이용객이 크게 늘어 하루 3편에서 8편으로 증편하는 일등공신이 됐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2006년 정리했다. 일본으로 가게 한 분이 어머니지만, 결국 돌아오게 한 분도 어머니였다. 큰 병을 앓으면서도 타국에 있는 딸에게 알리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는 어머니 병환 소식을 뒤늦게 듣고 고민 끝에 귀국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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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이미연 대한가수협회 사천시지부장이 지부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정오복 기자/

    녹록지 않았던 귀향

    귀국 후 부산 서면에서 학원을 운영했다. 그러나 국내 사정과 관행을 몰랐던 탓으로 투자비만 날리고 말았다. 수업료 치고는 손실이 너무 컸다. 이듬해 어머니가 계신 고성 하이면으로 돌아왔다. 레스토랑 경영 경험을 살려 식당을 개업했지만, 이마저도 문화 차이 때문에 쉽지 않았다.

    더 기막히는 일은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갔다 돈 벌어 왔다고 알려지면서 엄청난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다. 미스코리아 일본예선에서 입상할 정도로 미모도 뛰어나다 보니 소문은 더욱 증폭됐다. 급기야 대인기피증까지 생길 정도로 마음의 상처가 컸다.

    이때도 어머니가 힘이 됐다.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진정성이 있다면 머지않아 사실이 알려진다”고 충고하셨다. 어머니의 격려에 힘입어 경로잔치를 마련했고, 버스를 대절해 18개 면 어르신 600명을 모셨다.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보람과 함께 용기가 생겼다. 삶의 확실한 좌표도 찾았다. 오늘까지 지속적으로 경로잔치를 여는 계기가 됐다.

    그러던 2007년 어느 가을날, 몇 사람이 그녀를 찾아와 가수협회 창립을 요청했다.

    “노래에 특별한 재능이 없는 나에게 가수협회라니요. 너무 황당했죠. 몇 번을 고사하다, 노래로 봉사할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 용기를 냈습니다.”

    그해 11월 가수, 봉사가수, 봉사회원 등으로 구성해 본격적인 노래봉사를 시작했다. 찾아가는 가요무대, 효콘서트, 활력충전 사랑愛콘서트와 같은 규모 있는 가요제는 물론 비정기적인 봉사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

    이외에도 어머니 김복점(91) 여사 아호를 딴 옥연장학재단을 만들어 2008년부터 매년 모교 하이초등학생 5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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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남진(가운데)과 함께한 이미연씨.

    부모님은 인생의 스승

    미연씨 나눔의 원천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비롯된다.

    “부모님은 제 삶의 멘토입니다. 사람에게 행운과 불운은 동시에 오게 마련이기에 교만해서도, 결코 불행하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치셨어요. 또한 어릴 때 동냥 온 거지에게도 반드시 상에 제대로 밥을 차려 주셨죠. 남을 배려하고 베푸는 모습을 몸소 보여 주심으로써 자식들의 스승이 되셨죠.”

    2010년 5월 결혼을 결심한 것도 어머니의 적극적인 권유 덕분이었다. “가수협회 사무국장을 맡아 함께 일해 온 남편을 어머니가 오랫동안 지켜보신 모양입니다. 모든 일에 성실하고 진솔한 데다, 삶의 지향점도 둘이 닮았기에 행복할 거라 믿으신 것 같아요.”

    “부부가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사랑이고 존중이고 배려이며, 그래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있지요. 목적을 확실히 하고 초심과 진정성을 잃지 않는다면 바라는 것은 반드시 이뤄지리라 믿습니다.”

    미연씨 부부는 가까운 미래에 연고 없는 가난한 어르신들이 함께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마을을 조성한다는 꿈을 갖고 있다.

    정오복 기자 obokj@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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