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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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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12) 한국화에 담긴 함양 상림숲길

흐드러진 가을, 숲길도 마음도 물들이다
빛과 색으로 충만한
상림의 가을은 풍요롭습니다

  • 기사입력 : 2015-09-24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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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사람들이 가보고 싶은 곳, 가보지 못한 길을 화폭에 담아냅니다. 주로 경남의 절경들이지요. 한지에 옮겨진 아름다운 풍경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오는데요. 담백한 먹빛과 조화를 이루는 편안한 색감은 실경보다 더 자연스러운 느낌을 갖게 합니다.

    길을 걷기 전 그의 그림을 먼저 만났습니다.

    그림으로 만난 숲길은 웅장하고 아름다웠는데요. 남다른 크기부터 시선을 압도하더군요.

    한국화가 박상복씨의 ‘함양 상림숲의 만추’라는 작품인데요. 상림숲의 가을 절경을 담은 800호(488㎝×198㎝) 대작입니다. 완성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는군요.

    이 작품은 장지에 먹과 아크릴·수채화·한국화물감을 혼용해 채색한 실경산수인데요. 빛과 색으로 충만한 풍요로운 상림의 가을을 작가의 넉넉한 정서로 표현했습니다.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그려 마치 사진을 보는 듯 생생한 감흥이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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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이 함양인 박상복(왼쪽) 한국화가가 함양 상림에서 강지현 기자에게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아침 안개가 걷힐 때의 산책로를 담았다고 하는데요.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서일까요, 길 끝에서 퍼져나오는 눈부신 햇살 때문일까요. 작품에선 신비로움이 감돕니다.

    “저 나무들 좀 보세요. 바로 선 것이 있는가 하면 휘어진 것도 있고, 외롭게 선 듯하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있죠. 마치 인간의 삶과 길을 보는 것 같죠? 낙엽이 소복이 내려앉은 저 길을 걸으며 나무와 함께 호흡해 보고 싶지 않나요?”

    걸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작가와 함께 가봤습니다. 작품의 배경이 된 함양 상림숲으로요.

    상림은 함양의 젖줄인 위천을 따라 조성된 호안림(護岸林)입니다.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돼 있는데요. 1100여년 전 신라 진성여왕 때 함양태수로 부임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조림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만 해도 길이가 3㎞에 달했지만 이후 둑 허리가 잘리며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다고 해요. 마을이 들어선 하림은 흔적만 있고, 지금은 상림만 남아 천년의 맥을 이어가고 있지요.

    상림은 공원으로 꾸며져 주민들의 쉼터로 애용되고 있는데요. 숲에 닿자 작가는 상림에 얽힌 추억들을 쏟아놓습니다.

    “예전엔 주차장 부지와 연꽃밭 일대가 모두 논이었지요. 20여년 전 매립해서 편의시설을 만들었죠. 함평루 앞 잔디밭은 운동장이었는데요. 초등학교 때 그곳에서 멀리뛰기 시합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젊은 시절 읍내 다방서 선을 보고 상림숲길을 걸으며 데이트도 했더랬죠.(웃음)”

    상림 한가운데로 난 숲길 앞에 서자 가슴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합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 때문인데요. 어여쁜 단풍과 발목까지 덮이는 폭신한 낙엽은 없었지만, 고목 아래서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수십만 송이 꽃무릇 군락에 순식간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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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의 신록, 여름 녹음, 가을 단풍, 겨울 설경. 계절없이 아름다운 상림이지만 그중 으뜸은 단풍과 낙엽이 공존하는 만추의 상림이라더군요. 하지만 초가을 꽃무릇도 늦가을 단풍에 뒤지지 않습니다. 붉게 물든 상림의 초가을은 고혹적이었습니다.

    석산(石蒜)이라고도 하는 꽃무릇은 가을바람 살랑이는 9월 초, 뿌리에서 가느다란 꽃대가 올라와 여섯 장의 빨간 꽃잎을 틔웁니다. 꽃이 진 뒤 잎이 나는데 꽃과 잎이 영원히 만날 수 없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졌지요.

    산책로 양쪽 고목 아래 도열하듯 늘어선 꽃무릇이 길 끝까지 이어지는데요. 그 풍광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입니다.

    인적 드문 평일의 상림은 한적하고 평화로웠습니다.

    코끝에 닿는 바람의 숨결부터 도시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더군요.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숲의 향기는 또 어떻고요. 상림의 너그러운 품은 엄마 품처럼 포근했습니다.

    숲길을 걸으며 하늘을 향해 몸을 열어젖힌 꽃무릇처럼 두 팔을 벌려 하늘을 봅니다. 귀를 열어 산책로를 따라 놓인 개울의 물소리, 가을을 알리는 귀뚜라미 소리, 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듣습니다. 머리 위에선 나뭇잎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나무 아래 드리워진 짙은 음영은 꽃무릇을 한층 빛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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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복 作 ‘함양 상림숲의 만추’.

    잠시 벤치에 앉아 여유를 부려 봅니다. 도토리를 찾아 나선 다람쥐와 날갯짓이 한결 부드러워진 잠자리들이 길손을 맞습니다.

    대부분 낙엽활엽수로 이뤄진 110여 종 2만여 그루의 고목들이 20만8000여㎡의 상림을 채우고 있는데요. 산책길에선 고목들의 신성한 기운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대를 이어 상림을 지키고 있는 나무 중엔 500년 된 노목도 있다는데요. 인공숲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연은 서로에게 기대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천년 세월의 힘이겠지요.

    함양은 박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데요. 그래서인지 상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합니다.

    “지난여름 아버지와 함께 상림숲길에서 망중한을 즐겼지요. 작년 봄엔 강둑에서 다슬기 줍는 할머니를 그리기도 했고요. 이 길은 어느 계절에 와도 운치 있고, 걸어도 걸어도 질리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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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복 한국화가가 상림의 물레방아가 있는 숲길을 걷고 있다.

    작가의 말대로 1.6㎞의 산책길은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함양읍성의 남문이었던 함화루, 이은리 냇가에서 옮겨온 이은리 석불, 시인묵객들이 음풍농월하던 사운정, 금호미 전설이 담긴 금호미다리, 함양을 빛낸 선인의 흉상과 공덕비가 있는 역사인물공원, 쉼 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를 차례로 만나기 때문인데요. 산책로를 따라 함양의 역사를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또 연리목(連理木), 지압보도, 잔디광장, 음악분수대, 연꽃공원, 연못 등 곳곳에 볼거리 즐길거리도 가득합니다. 때문에 연인들에겐 데이트 장소로, 가족들에겐 나들이 코스로, 아이들에겐 자연생태학습장으로 손색이 없는데요. 상림 입구에 천년상림코스, 역사탐방코스, 사색의숲코스가 자세히 소개돼 있으니 마음에 드는 코스를 골라 걸어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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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이 함양인 박상복(오른쪽) 한국화가가 꽃무릇이 만개한 함양의 상림 숲길을 걷고 있다./김승권 기자/
    오붓한 오솔길을 지나 물레방아를 보고 돌아 나오는데,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는 걸음이 아쉬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위천을 바라보며 걷는 둑길, 드넓은 연밭을 친구 삼아 걷는 논두렁길에도 들러보세요.

    반복된 일상에 지쳐 있다면 하루쯤 훌훌 털고 상림으로 떠나 보면 어떨까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느긋한 걸음으로 호젓한 천년 숲길을 걷다 보면 응축된 자연의 기운이 지친 당신의 몸과 마음을 도닥여 줄 겁니다.

    강지현 기자 press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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