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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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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13) ‘우포늪 왁새’ 찾아간 우포늪 둘레길

詩 발자국 찍으며, 자연에 푹 빠져 걷는 길
갖가지 생명들이 빽빽이 들어차 유유히 살아가는 곳

  • 기사입력 : 2015-10-01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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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한봉 시인이 창녕 우포늪 소목나루터에서 이슬기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배 시인은 지난 1999년부터 8년간 거의 매일 우포를 찾았다고 한다./김승권 기자/


    우포늪 왁새/배한봉


    득음은 못하고, 그저 시골장이나 떠돌던

    소리꾼이 있었다, 신명 한가락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그만이던 흰 두루마기의 그 사내

    꿈속에서도 폭포 물줄기로 내리치는

    한 대목 절창을 찾아 떠돌더니

    오늘은, 왁새* 울음 되어 우항산 솔밭을 다 적시고

    우포늪 둔치, 그 눈부신 봄빛 위에 자운영 꽃불 질러놓는다

    살아서는 근본마저 알 길 없던 혈혈단신

    텁텁한 얼굴에 달빛 같은 슬픔이 엉켜 수염을 흔들곤 했다

    늙은 고수라도 만나면

    어깨 들썩 산 하나를 흔들었다

    필생 동안 그가 찾아 헤맸던 소리가

    적막한 늪 뒷산 솔바람 맑은 가락 속에 있었던가

    소목 장재 토평마을 양파들이 시퍼런 물살 몰아칠 때

    일제히 깃을 치며 동편제 넘어가는

    저 왁새들

    완창 한판 잘 끝냈다고 하늘 선회하는

    그 소리꾼 영혼의 심연이

    우포늪 꽃잔치를 자지러지도록 무르익힌다

    *왁새:왜가리의 별명


    나무 위에 나팔꽃 덩쿨이 올라타 있다. 무거울 만도 한데, 나뭇잎은 덩쿨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싱그럽다. 늪에는 물을 정화시키는 마름과 개구리밥, 생이가래가 빽빽이 들어찼고, 멸종위기식물 2급으로 지정돼 있는 가시연이 뿔 돋친 잎을 넓고 푸르게 깔았다. 덕분에 백로들은 물 위에 공중부양한 듯 유유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 1억4000만년 전이든 기원전 4000년이든, 1000년이 몇 번이나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물이 고여 있던 우포늪에서 생명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9월의 끝에 다다른 날, 이곳에 홀린 듯 내려와 8년을 살았던 배한봉(53) 시인과 우포늪 둘레를 걸었다. 우포늪은 우포, 목포, 사지포, 쪽지벌 이 네 늪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내륙습지로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로 인정받는 람사르 습지이기도 하다. 거대한 생태계가 꿈틀대고 있는 신비한 곳, 배 시인이 마음먹고 시를 써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여행했던 우포늪이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난 1999년,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창녕으로 내려왔다. 네 식구는 승용차 한 대만한 방에서 생활했다.

    배 시인은 창녕에 산 8년간 거의 매일같이 우포에 출퇴근했다. 입문용 산악자전거가 그의 발이었다. 집에서 우포까지는 자전거로 40~50분이 걸렸다. 왕복 2시간이 걸리는 거리, 우포가 그렇게도 좋다면서 왜 좀 더 가까운 곳에 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거리가 필요했어요. 아름다운 것도 너무 가까이서 보면 진면목을 잘 보지 못할 수 있어요. 우포뿐 아니라, 사람도 그렇잖아요. 친구, 연인 사이가 그렇듯 너무 붙어 있기만 하다 보면 그 사람의 매력적인 부분을 놓치기 쉽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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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오랜만에 찾은 우포이지만 서른 번이 넘는 계절을 넘기며 자전거로 누볐던 터라 길에 훤했다. 그새 바뀐 풍경들도 짚어내면서 비포장도로로 가기를 제안했다. 그의 말에 따라 소야마을쪽으로 난 농로로 차를 몰았다. 이윽고 키가 큰 풀과 나무가 차의 온몸을 훑는 소리가 났고, 늪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의 발길이 덜 닿은 이곳, 가장 자연 그대로인 곳에 다가가는 것이 느껴졌다. 멀찍이서 바라보던 자연과 달랐다. 그는 우포늪에 다가갈 때 조급하게 굴지 않았다는 말로 이야기를 꺼냈다. 듣다 보니 연애사에 가까웠다.

    “무조건 가서 좋다고 하면 상대가 좋아하겠어요? 자연도 똑같아요. 들이댄다고 시가 쏟아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우포늪에 얼쩡거리기부터 했어요. ‘저이가 나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알아챌 정도로만.”

    자연을 연애 대상으로 치환할 수 있는 건 우포에, 자연에 대한 그의 인식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에 사는 생명들을 ‘사물’로 부르지 않았다. 생태계의 일원인 그와 ‘동등한 존재’로 여기려 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을 사물로 여기면서 지배·착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싫었단다. 그가 가리키는 손끝 멀리 대대마을 뒤로 산을 할퀸 것처럼 낸 길이 보였다. 가시연의 속살을 사진에 담기 위해, 꽃잎을 칼로 찢어 활짝 핀 모습을 연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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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한봉 시인이 창녕 우포늪 소목나루터에서 이슬기 기자를 태우고 잠시 늪으로 나가고 있다. 배 시인은 지난 1999년부터 8년간 창녕에서 생활하는 동안 거의 매일 우포를 찾았다고 한다./김승권 기자/
    “‘환경’이라는 단어를 ‘생태’와 같은 말로 알고 쓰는 경우가 많은데, 환경은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자연을 바깥에 둬요. 자연이 인간을 위해 바꿀 수 있는 대상, 사물인 거죠. 생태라는 말과는 달라요. 만약 우포늪을 사물로 대한다면 나보다 하급한 존재로 여기는 걸 느낄 텐데, 얼마나 싫겠어요. 연애를 하려면 진심을 갖고 바라봐야 서로 사랑하고 존중해줄 수 있잖아요. 우포늪에도 보여주기식 친화보다는 우포늪과 진심으로 대화를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찾아갔습니다.”

    시인은 우포늪과 대화를 나눴던 길을 안내했다. 그동안 그는 물억새와 갈대의 차이를, 늪에 떠 있는 수생식물의 이름을, 검은 날개를 접고 지나간 매의 이름을 가르쳐줬다. 사지포제방에서 바라보면 버드나무가 소년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닮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둑에 오를 때마다 눈이 바람에 씻겼다. 맑은 눈으로 서둘러 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을 담았다. 사지포, 목포, 대대 등 늪을 가르고 있는 둑마다 다른 모습의 우포를 보고 들었다. 수업 아닌 수업을 들으며, 그가 우포늪으로부터 응답을 받았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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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한봉 시인이 창녕 우포늪 주매제방에서 이슬기 기자와 의자에 앉아 늪을 바라보고 있다./김승권 기자/


    “우포늪이 어느 날 말을 걸어왔어요.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은 듯 기뻤지요. 그때는 그래서 시를 정말 ‘어마무지하게’ 많이 썼어요. 사진도 많이 찍었고요.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우리가 서로 바라보면, 상대의 눈동자 안에 내가 비치잖아요. 그걸 ‘눈부처’라고 하는데, 우포늪이 제 눈부처더라고요. 우포늪 안에 제가 비치고 있는 것을 보고, 찾았습니다.”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이 된 시 ‘우포늪 왁새’도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다. 왁새는 왜가리의 별명. 대대제방에서 울며 날아가는 왁새를 볼 수 있었다. 시 첫 줄에 등장하는 그 울음소리, 끊길 듯 이어지는 우악스런 외침이다. ‘왁왁’. 시에 등장하는 소리꾼이 자신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외로웠죠. 시를 제대로 쓰지도 못하면서 시인인 척을 해왔으니, 우포늪에서 시에 헌신해 좋은 시 한 편 쓰고 싶다는 욕망이 나온 것 같아요. 또 왁새라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존재의 깊은 바닥이 서로 만나 합일되고 거기서부터 뻗어나가는 생명력을 자운영꽃과 불로 확장시키고도 싶었어요.”

    트인 전망과 일출 일몰, 앞에 펼쳐진 늪의 형태로 사진작가들도 많이 찾는다는 주매제방에 올랐다. 제방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오니 소목나루터가 보였다. 뭍 가까이에 쪽배 3척이 그림처럼 떠 있었다. 이끌려 다가가다 멈춰섰다. 발 아래 열 마리도 넘는 노랑나비가 날개를 접고 쉬고 있었다. 숨죽인 채 조심스레 다가가니 예민한 나비들도 가까운 거리를 허락했다. 나비가 춤을 추기 시작했고, 넋을 잃은 채 바라봤다. 우포늪을 신비롭고 아름다운 생태계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읽은 것처럼 곱게 날아줬다. 우포늪이 제대로 환영해주고 있다는 시인의 말 위로 ‘자운영 꽃불’만큼 강력한 노란색 바람이 불었다. 멀리 떨어진 곳의 나비 날갯짓이 토네이도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을 나비효과라고 했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연을 바라보는 마음이 우포늪을, 아니 세상을 노랗게 뒤덮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슬기 기자 good@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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