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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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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15) 민주 함성 따라 걷는 신마산 연애다리

36년 전 그날, 눈부신 연애 대신 ‘시대와 연애’가 시작됐다

  • 기사입력 : 2015-10-22 22:00:00
  •   
  • 신마산 연애다리

    낮은 휘파람 불면
    저녁별들 하나 둘씩 돋아 나오던
    그 다릿껄

    달의 맨얼굴
    개여울 소리에 푸르게 씻기던
    그 다릿껄

    오래된 버드나무
    긴 머리채 쓸어내리는 바람 어두워질 때
    숨어서 속삭이는 말들 뜨거웠던
    신마산 연애다리

    언젠가는 목덜미 뽀얀 계집애랑
    달그림자 지는 풍경으로 남아 있으려고
    마음에만 새겨놓은 그 연애다리를
    시월 그날엔 어쩌자고 함부로 건너갔던가

    쨍쨍한 오후 시간을 뚫고
    마구 서둘던 수천 개의 발자국 소리
    좁다란 다릿길 들썩거리며
    유신시대 덮을 구름무늬로 흩어지던 순간,

    눈부신 연애의 추억 한 장 없이
    연애다리를 건넜던 사람들
    다음날부터
    폭도로 불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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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36년이 흐른 지난 18일 오전 창원시 마산합포구 문화동 ‘신마산 연애다리’ 위에서 이슬기 기자가 우무석 시인으로부터 그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봄이 되면 벚꽃잎이 하얗게 날리는 동네, 이제는 가을물이 든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문화동, 나무들과 함께 자라며 이곳 지리에 빠삭한 사람이 있다. 가세가 기울어 고등학생 때부터 연탄을 쉼없이 날라 다닌 곳이라고 했다. 계단을 세며 드나들었던 외가댁도 이 동네였다. 외삼촌댁이 어려워져 세들어 살던 집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오아시스 기타공장도, 삼립 빵 공장도 어디였는지 척척 맞힌다. 그가 이 동네 지리에 훤했다는 것이 36년 전 행동의 출발점이 됐다.

    벚나무 따라 산책할 수 있는 길, 그 끝에 다리가 하나 있다. 남녀 한쌍 실루엣이 그려진 안내판이 난간에 붙어 있다. ‘신마산 연애다리’. 안내판에는 1980년대 많은 커플들이 이 다리를 지나다니며 사랑을 키웠다고, 벚꽃이 만발할 때면 청춘남녀 누구라 할 것 없이 약속장소로 소문이 났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 다리는 청춘남녀의 연애장소로만 남을 다리가 아니라고, 그가 말했다. 우무석(56) 시인,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장이다. ‘마구 서둘’러 다리를 건넜다는 날, 그러니까 부마민주항쟁이 마산에서 벌어진 날로부터 꼭 36년이 지난 날, 그와 ‘신마산 연애다리’를 건넜다.

    사건의 시작은 1979년 10월 18일 목요일 오후 2시 20분께, 경남대 교내방송으로 휴교령이 나올 때부터였다.

    “MBC에서 대학생의 결혼관을 주제로 인터뷰하기로 해서 좀 잘 보이려고 빨간 티에 오랜만에 곤색(남색) 바지를 날 세워 입고 간 날이에요. 근데 아침부터 학교가 어수선하고 갑자기 방송이 나와 뭔가 이상했죠. 제가 알기로는 그날이 데모를 하기로 한 날이 아니었거든요. 부산에서 통학하는 친구들도 있어서 이미 부산에서 무슨 일이 터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도 바로 일이 생길 줄은 몰랐죠.”

    1차로 학생들이 빠져나가고는 학교 정문이 굳게 잠겼다. 학생들은 교수와 교직원들에 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했다. 경찰들은 학생들을 몰았다. 창원군청 앞에서 학생들과 경찰이 대치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빠져나오려면 골목밖에 없었다.

    “계획돼 있던 집회도 아니라 당황했는데 일단 골목으로 가자 했죠. 제가 길을 아니까 어쩌다 안내하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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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다리를 알리는 표지판.


    그때 학생들이 학교서 뛰쳐나와 산복도로로 빠져나간 다리가 이 연애다리다. 좁은 시멘트 다리에는 이제 데크가 넓게 깔렸다. 볕이 잘 들고 다리 가운데 의자가 놓여 있어 어르신들이 찾는 휴식처가 됐다. 다리 바로 위, ‘머리채 쓸어내리’던 큰 수양버들이 있던 곳에는 나무는 사라지고 작은 공원이 조성돼 있다. 따사롭고 평화로운 가을볕 아래, 치열했던 그날 일을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생생히 증언하는 우 시인의 목소리가 그날로 다시 잡아끌었다. 정성기, 최갑순, 옥정애, 이윤도… 사람들의 이름이 호명됐다. 그가 지난 2013년에 쓴 10·18부마민주항쟁 기념시집 ‘10월의 구름들’에서 본 이름들이었다. 시집은 곧 증언집이었다. 그의 이야기와 시들이 퍼즐처럼 맞아떨어져 갈 때, 깨달음에 자꾸 무릎을 쳤다.

    “저기까지는 학생이었다가, 이 다리를 건너면 폭도가 됐어요. 그래서 신화에서 말하는 통과제의처럼 아주 상징적인 공간인 거죠. 입사식의 아주 중요한 통로로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이 다리를 건너면서 우리가 미성숙한 학생계급에서 성숙한 사회의식을 가진 사람이 되는 거죠. 또 국가와 사회의식, 정의, 저항하는 정신을 사랑하게 되는 그런 다리로 의식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썼어요. 시대와의 사랑, 시대와의 연애 정도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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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연애다리를 지난 학생들은 ‘산복도로를 달렸다’. 제일여고 지날 때 여학생들의 힘내라는 응원소리를 들으면서. 이어 중앙고 마산여고, 마산고, 마산중을 지나 자산삼거리에서 꺾어 무학국민학교(초등학교), 3·15의거탑 쪽으로 내려왔다. 구호는 ‘유신철폐, 독재타도’였다. 아직 민중가요가 채 보급되지 않았을 때, 애국가가 그들의 노래였다. 유명했던 빵집 만미당에 다다르기 전, 같이 대열을 정비하며 내달리던 바바리코트 여학생이 경찰에 끌려가는 것도 봤다. 끝내 구하지 못하고 마음의 빚을 진 채, 그는 밤새 거리에 머물렀다. 용마맨션 2층에 있는 공화당사 현판도 부수러 가자 외치고, 경찰차를 도랑에 빠트리기도 했다. 양덕파출소가 불타는 것도 지켜봤다. 다행히 붙잡히지 않았다. 아침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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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0월 휴교령이 내려진 경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경남신문DB/


    3·15의거탑을 끼고 있는 초등학교를 나와서도 3·15와 부마항쟁에 대해 잘 모른다는 부끄러움에 스스로 고백하고 물었다. 민주주의를 일구고 마산정신을 되살린 항쟁을 지금 세대는 잘 모르지 않냐고.

    “역사책에서 제대로 설명도 안 하니까요. 현 정부 아래서 부마항쟁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지도 의문이지요. 교과서 국정화도 북한을 핑계 대지만 결국 자기 정권에 맞는 담론을 재생산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의 사건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데 그걸 한 가지로 규정하겠다니, 말이 안 되는 거죠. 지방자치단체에서도 교육을 강화하면 좋은데. 연애다리에 부마항쟁의 기록이나, 시가 있었다면….”

    그날의 이야기들이 알알이 맺힌다. 아직도 쓸 이야기들이 100가지 이상 남았다고 했다. 다시 구름들을 상상하는 일이 남았다. 예전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도 어려웠다는 좁은 시멘트 다리, 그 위로 소독차가 지나가듯 10월의 구름들이 이 다리 지나 골목 구석구석 퍼져나가는 일, 분을 품은 희망을 안고 넘어가는 일, 학생에서 민주사회의 시민으로 성장하는 일을. ‘수천 개의 발자국 소리’가 심장소리로 울린다. 나도 슬쩍 구름이 돼 건너본다.

    글= 이슬기 기자

    사진= 전강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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