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기자] 김유경기자의 스페인·포르투갈 편 (4)
- 기사입력 : 2015-10-30 14: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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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_방송인터넷부 김유경 기자/스페인·포르투갈 편
(4)포르투갈 바다에 파도가 치면 파두(Fado)를 불러요
아직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해 여름. 내가 한 첫경험을.
때는 1993년이었다. 그 곳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다소 습했으며 동굴처럼 서늘했다. 나는 손발을 더듬거리며 안으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 멀리서부터 거대한 빛이 얼굴에 들이쳤다. 큰 물결 같고, 거대한 소용돌이 같은 빛. 뭔가 굉장한 것이 내 앞에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몹시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켠은 마구 설레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냐고? 그날은 난생 처음 영화관에 디즈니 만화가 아닌 '어른들이 보는 영화'를 보러간 날이었다.(다른 걸 기대하셨다면 죄송. 첫경험이란 어휘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지 않나.)
처, 첫…경험?! 대략 이런 거 상상하셨다는 거 다 압니다./MBC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무엇보다도 '서편제'라는 영화의 서사가 주는 충격이란! 그건 솔직히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는 실로 어려운 것이었다.(아마도 부모님은 맡길 곳이 없어 부득이하게 나를 데려갔을 거다. 얌전히 잠이라도 잤다면 편했으련만 이 웬수같은 딸내미는 두 눈을 또록또록 뜨고 팝콘이랑 오징어 먹어가며 영화를 시작부터 끝까지 다 봤다.)
특히 김명곤이 오정해에게 소리의 완성을 위해, 한(恨)을 심어주기 위해 극약을 먹여 눈을 멀게하는 장면. 나는 이상하게도 그 장면이 너무 슬펐다. 더 슬펐던 건 오정해는 이미 아버지가 자신에게 독을 먹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거였다. 오정해는 자신의 생(生)을 온전히 판소리에 바칠 작정이었던 거다. 그녀는 점점 어두워져가는 눈으로, 혼신을 다해 소리를 했다.
오정해는 득음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기꺼이 극약을 먹고 두 눈을 잃었다.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그게 너무 너무 슬펐다.
아, 물론 떠나기 전에 대충 주워들은 것도 있긴 있었다. 지난달 초순, 기획취재 심사에 통과돼 들뜬 마음으로(원래 소풍이나 수학여행은 가기 전날이 더 행복하다.) 이것저것 준비를 하는 동안, 회사 선배 한 분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리고 흰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100달러 지폐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선배가 말했다. '유경아. 부탁 하나만 하자' '네. 말씀하세요.' '포르투갈에 가면 파두 음반 한 장만 사오너라.' '네? 뭐요? 파도?' '아니. 파도가 아니고 파두(Fado).' '파두요? 그게 뭔데요?'(이 말할 때 솔직히 스스로가 좀 무식하다고 느껴졌다. 뭐든지 수박 겉핥기 식으로나마 아는 척이라도 해야 사람이 덜 무식해 보인다.) 그때 선배가 말한 음악이 바로 포르투갈의 노래, 파두였다.
선배가 준 100달러로 사온 파두 음반. 선배! 잘 듣고 계시죠?파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지도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오른손 검지를 들어 지도 위에 놓아보자. 그리고 수많은 나라들을 헤집고 포르투갈을 찾아보자. 어디에 있는가? 포르투갈은 드넓은 대서양이 곧바로 바라다보이는 위치에 있다.
옛 포르투갈 사람들은 900㎞에 달하는 긴 해안을 따라 걸으며 이런 생각을 했을 거다. '이 망망대해를 정복하면 대서양의 패권을?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당시 사람들은 지구가 평면이라 계속해서 배를 타고 나가면 지구 끝에 다다라 밑으로 떨어져 죽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무시무시한 세계관을 갖고도 해양대국을 꿈꾸었다니. 대단한 용기다.)포르투갈은 카스티야(Castilla)로부터 분리 독립해 왕국을 성립한 후, 대항해 시대를 열어 갔다. 아프리카 서해로 향하는 신항로를 발견해 브라질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고,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1469~1524)가 인도항로를 개척해 중계무역을 하며 찬란한 황금기를 누렸다.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 기념탑. 취재 막날에 이 곳에 들렀다. 바스코 다 가마가 항로개척을 위해 출발한 바로 그 지점에 세워져 있다. 바다를 향해 전진하는 포르투갈인의 야망과 영광이 담겨있다.
동시에 항해를 떠난 남자들에겐 조국에 대한 향수와 고독,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야만 하는 형극(荊棘)이 주어졌다. 이때부터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바다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다리는 자와 떠난 자가 바다에서 또 육지에서 각자의 애절한 마음, 속절없는 마음, 두려운 마음을 담아 부른 곡조가 바로 파두였다. (그래서인지 파두는 운명, 숙명을 뜻하는 'Fatum'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얼굴이 공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으나, 시리즈도 끝나가고 하니 한장 은근슬쩍 실어보기로 마음을 바꿨다. 대항해 시대 기념탑 앞 광장 바닥에 세계전도가 대리석으로 새겨져있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참 작고 앙증맞다.
포르투갈의 땅끝마을 로카 곶(Cabo da Roca). 유라시아의 최서단이라고 할 수 있다. 저 멀리 보이는 큰 바다가 바로 대서양이다. '이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멋진 싯구가 비석에 새겨져있었다.
거리에서, 까페에서, 노동 현장에서, 포르투갈 사람들은 파두를 입버릇처럼 즐겨 부른다. 워낙 감정이 과잉되고, 청승맞다 느껴질 정도로 애절한 노래다보니 즉흥성도 짙다.(즉석에서 가수와 기타 연주자의 호흡에 따라 곡조가 자유롭게 변용되기도 한단다.)
우리나라에 파두가 알려진 건 1987년 방영된 김수현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 파두 곡이 삽입되면서 라고 한다. '미자' 역을 맡은 차화연과 '태수' 역을 맡은 이덕화가 커피숍에만 들어가면 흘러나오는 청승맞은 노래가 파두였다. 근데, 차화연 아줌마. 젊었을 때 진짜 아름다우셨네. /스타뉴스/
아말리아는 'Barco Negro(검은 돛배)', 'Que Deus Me Perdoe(신이여 용서하소서)' 등 명곡을 탄생시켰고, 당시 상류층에게는 저급한 문화로 여겨졌던 파두를 현대화 시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일등 공신이었다. 일흔까지 현역으로 노래했고, 무려 170개의 앨범을 냈다. '파두는 나의 생활태도이며 나의 시'라는 말은 그녀가 남긴 최고의 명언이 됐다.
여든의 나이로 1999년 10월 6일 숨을 거둔 뒤, 포르투갈의 모든 언론은 프로그램 일정을 일제히 취소하고 그녀만을 애도했다. 심지어 아말리아의 장례식은 3일간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어느 정신 나간 나라가 유명 가수 하나 저세상 갔다고 국장을 치러주겠는가? 포르투갈 국민들에게 정말 엄청난 의미를 지닌 여성이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전성기 때의 모습이다. 리스본엔 그녀의 생가와 그녀가 쓰던 장신구, 가구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고 한다. /네이버 백과사전/
다만 일정 중간에 방문하게 되는 음식점이나 휴게소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한 곡조에 잠깐 귀를 적시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급하게 음반 가게에 들어가 선배가 부탁한 음반을 구입하는 성의는 보였다.(100달러나 받았으니 빈 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사람이 양심이 있지.)
선배가 부탁한 음반을 사면서 내 것도 하나 사봤다. 포르투갈 말을 모르니 솔직히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뭐, 매우 아름다운 노래들이라는 건 알겠다.글을 끝마치려니 문득 드는 생각. 오정해는 판소리에 순교했고 아말리아는 파두에 순교했다. 나는 남은 인생을 무엇에 바치게 될까. 지난 30년 간은 그 어떤 것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온전히 몰입한 적이 없는 천둥벌거숭이였던 나.
과연 앞으로 무엇이 나의 생활태도가 되고 시가 될까?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파두나 열심히 들어야겠다.)
ps. 파두 가수 '돌체 폰테스(Dulce Pontes)'가 부르는 '바다의 노래(Cancao do Mar)'다. 한번 감상해보시길. 매우 애절하다. 강추.
https://www.youtube.com/watch?v=QCahD0M9cv4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 '꽃보다 기자 스페인·포르투갈' 다음편에서는 마지막 편인 '(5)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일주일, 그 시시콜콜한 뒷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관련기사 - 김유경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